신(新) 한옥 전성시대

198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와 재개발·재건축 바람은 한옥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이 가능한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보급되면서 ‘살기 불편한’ 한옥은 사람들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기와가 너덜너덜한 한옥 밀집지는 재개발 대상 1순위에 올라 가차 없이 불도저에 밀렸다.현재 서울시 전역에 남아 있는 한옥은 2만 채가량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2년 전인 지난 2006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의 한옥은 종로구 성북구 동대문구 등지에 2만4000여 채가 있다. 골목길을 중심으로 50채 이상의 한옥이 군집한 곳은 98여 개 지역이다. 수치로 보면 아직 제법 많은 수의 한옥이 서울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이 가운데 상당수가 재개발 등의 개발 대상 구역에 속해 있어 조만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조사 시점이 2년이나 지난만큼 그동안 적지 않은 폭의 감소도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아현동과 창신동 등은 뉴타운 같은 대규모 재개발사업구역에 속해 있고 신공덕동 공평동 익선동 등은 도심재개발구역에 속해 있어서 그 운명이 풍전등화 격이다. 청량리동 홍제동 등도 균형발전촉진지구에 속해 있다.시정개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총 98개 한옥 밀집 지역 가운데 62개 지역이 일부 또는 전체가 개발될 예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재개발 예정지에 포함된 한옥은 전체의 48.9%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한옥들도 개발 바람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이처럼 한옥이 급속도로 줄고 있는 현실 이면에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옥이 전에 없는 인기를 구가하면서 첨단 주상복합 아파트 뺨치는 트렌디한 주거 공간으로 급부상한 것이다.이는 유행을 가장 빨리 반영하는 방송 드라마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얼마 전 종영한 MBC 일일 드라마 ‘아현동마님’의 주인공 가족은 한옥 저택을 대가족의 생활 터전으로 선택한다. 소나무로 지은 황금색 한옥의 웅장함과 넓은 정원은 시청자들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SBS 드라마 ‘온에어’에서는 연예인 매니지먼트사의 사옥이 한옥으로 설정되기도 했다. 원칙을 고수하지만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의 이미지가 한옥 사옥과 잘 매치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여기에 2006년 서울 시장 임기를 마친 이명박 대통령이 가회동 한옥으로 이사한 것도 한옥에 대한 이미지 전환에 큰 역할을 했다. 대선 출마 이전 이 대통령은 가회동 한옥에서 각종 방송, 잡지 인터뷰를 진행해 전통 가옥을 사랑하는 우아한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이처럼 한옥은 방송과 유명인을 통해 여러 사람이 선망하는 주거 공간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배경에는 ‘북촌’이라는 한옥 밀집지가 자리 잡고 있다. 드라마 속 멋진 한옥이 있는 곳도, 이명박 대통령이 살았던 곳도 모두 북촌이다.북촌은 서울에서 한옥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지칭하는 북촌은 두 군데 대궐 사이에 있다고 해서 ‘양궐 사이’라고도 한다. 현재 가회동, 삼청동 등 9개 동에 900여 채의 한옥이 남아 있다.북촌은 한옥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피는 ‘핫 플레이스(hot place)’다. 서울시가 대표적인 한옥 밀집지인 북촌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하고 2001년부터 북촌가꾸기사업을 시작한 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첫 번째 계기가 됐다. 이후 2006년까지 800여억 원의 지원금이 풀리면서 새 단장하는 집이 하나둘 늘어났다. 서울시 북촌사업추진반 관계자는 “지금까지 300여 건의 한옥 개·보수 지원이 이뤄졌다”고 밝혔다.두 번째 계기는 입소문에서 비롯됐다. 북촌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아 블로그를 장식하는 1인 미디어가 많아진 게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북촌 초입의 A부동산 관계자는 “주말에 카메라를 들고 북촌을 찾는 젊은이들이 바로 북촌 홍보대사들”이라고 말했다. 이들에 의해 북촌이 구석구석 소개되면서 ‘서울의 명소’로 거듭났다는 이야기다.어린 시절 살았던 한옥을 추억하는 이들에겐 한옥이 가진 친환경적인 장점이 첫손 꼽히는 매력이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자연 친화적인 집이라는 점은 요즘 유행이라는 웰빙과도 정확하게 매치된다. 박명덕 동양공전 건축과 교수는 ‘한옥’이라는 책에서 “한옥은 자연 속 선경에 어울려 있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박 교수는 또 “마당을 통해 연결되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는 각기 개방성과 폐쇄성을 유지하고 마루와 온돌은 여름과 겨울이 있는 한반도 기후에 가장 적합한 기능을 갖고 있다”고 평했다.한옥 건축업을 하고 있는 김장권 북촌HRC 대표도 “한옥의 자연 친화적이고 과학적인 설계가 가지는 매력이 대단하다”면서 “좋은 집을 찾다 보면 한옥이 정답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말했다.한옥이 가진 희소성의 가치도 빼놓을 수 없다. 재개발 열풍으로 한옥이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한편에선 희소성에 주목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특히 한옥이 많은 지역이 사대문 안 입지 여건이 좋은 도심이라는 사실은 재테크적 가치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있다.수년 전부터 한옥의 재테크적 가치를 역설해 온 고종완 RE멤버스 대표는 “북촌의 경우 입지 여건이 좋은 데다 희소성까지 갖춰 금상첨화”라면서 “한옥의 자연 친화적인 매력과 상품성에 눈을 뜨는 자산가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도심 속 세컨드 하우스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박상언 유엔알컨설팅 대표는 “도심 가까운 곳에 세컨드 하우스를 원하는 고령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북촌 투자 움직임이 늘고 있다”면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입지 여건이 좋은 데다 물량이 한정돼 있으니 가치 상승이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상황이 이러니 덩달아 땅값 집값도 뛰고 있다. 서울시가 북촌을 보존하겠다고 나선 2001년 3.3㎡당 500만 원선이던 땅값은 2006년 1000만~1500만 원선으로 오르더니 지금은 3000만 원선으로 뛰었다. 북촌 인근 안국부동산 관계자는 “아파트와 달리 시세가 공개되지 않고 물량이 달리는 통에 주인이 부르는 게 곧 값”이라고 전했다. 가회동에서만 30년 살았다는 D부동산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 한옥이 있는 가회동 31번지는 얼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높이 형성돼 있다”면서 “가회동 터줏대감들도 지금 가격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이에 비해 체부동 통의동 등 경복궁 왼쪽의 한옥 밀집지는 가격이 다소 낮은 편이다. 최근 한옥 보존 필요성 때문에 재개발이 불허된 체부동의 경우 3.3㎡당 2000만~2200만 원선에 가격이 형성돼 있다. 김연주공인중개사 대표는 “다른 지역 같으면 재개발이 불허되면 즉시 집값이 떨어지는 게 보통인데 체부동은 그렇지 않다”고 전했다. 한옥 보존지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돼 있다는 얘기다.지금으로선 한옥만큼 귀하게 취급되는 주택이 없다. 강남 재건축이 맥을 못 추고 종합부동산세에 양도세가 주택 경기를 짓누르고 있지만 한옥만큼은 무풍지대다. 오히려 뒤를 팍팍 밀어주는 지원 정책에 눈이 돌아갈 정도다.특히 서울시가 한옥 밀집지 보존에 팔을 걷어붙인 데다 한옥의 장점을 잘 알지 못하는 20~30대 젊은 층에서도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어 앞으로도 주가가 계속 올라갈 조짐이다. 특히 서울시는 북촌을 한옥 재개발하겠다는 구상까지 내놨다.서울시가 구상하는 한옥 재개발은 낡은 한옥을 허물고 아파트 등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한옥을 다시 짓는 새로운 재개발 방식을 말한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주택국 내에 한옥 재개발 테스크포스팀을 설치하고 대상 구역 설정, 방식 등을 연구하고 있다. 주택국 관계자는 “한옥 재개발은 멸실 방지 대책과 함께 추진된다”면서 “서울의 전통성을 회복하면서 웰빙 주택인 한옥의 보급을 확산시키는 쪽으로 사업이 추진될 것”이라고 밝혔다.지난 5월 서울시는 한옥보존지구를 삼청동 팔판동 일대로 확대하고 한옥 외의 주택을 신축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옥 재개발의 전초 작업을 한 셈이다. 이로써 한옥보존지구는 가회동 계동 등 64만5000㎡에서 107만6302㎡로 커졌다.서울시의 한옥 프로젝트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옥 소유자가 주택을 팔 경우 장기 전세 주택인 시프트나 일반 분양 주택을 특별 공급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서울시가 사들인 한옥은 외국인 게스트하우스로 위탁 운영하는 등 한옥마을 운영에 활용한다는 계획이다.이와 별도로 서울시는 2002년부터 한옥 개·보수와 신축에 자금을 지원해 왔다. 개·보수의 경우 전체 비용의 3분의 2 이내에서 최대 3000만 원까지 무상 지원된다. 또 2000만 원을 연 1% 이자 조건으로 융자받을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 등 일반에 개방하는 한옥인 경우는 최대 6000만 원을 무상 지원받을 수 있다.하지만 서울시의 북촌가꾸기사업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다. 보통 사람들이 살던 평범한 마을 북촌이 인위적인 개·보수와 신축 정책에 휘둘려 ‘무늬만 한옥마을’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그것이다. 남산 한옥마을처럼 껍데기만 남아 관광객을 위한 전시장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서울시가 무상으로 개·보수 자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콘크리트에 기와를 올린 가짜 한옥’을 양산한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지난 2006년에는 북촌에 살던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 씨가 서울시의 북촌가꾸기사업에 반대하다 시공업자 등과 몸싸움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당시 킬번 씨는 “한옥 개·보수를 한다면서 전통 한옥의 구조를 무시한 공사가 공공연하게 벌어져도 별다른 규제가 없다”면서 분통을 터뜨렸었다.북촌가꾸기사업 때문에 북촌 일대가 부동산 투기장화되고 있다는 문제 제기도 나와 있다. 실거주 목적보다 시세 차익을 목적으로 한 투자가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북촌 D부동산 관계자는 “최근 1~2년 사이 손바뀜된 한옥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꽤 있다”면서 “세컨드 하우스로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시세 차익 목적으로 사 두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이 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김장권 북촌HRC 대표는 “한옥은 갑자기 생긴 새로운 주택이 아니다”면서 “한동안 버려두었던 것에 다시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단계인 만큼, 전통 가옥에 대한 애정이 우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요즘 서울 삼청동과 가회동 등지에 가면 한옥의 ‘트렌드’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평범한 가정집이었을 한옥들이 세련된 인테리어를 입고 속속 변신 중이기 때문이다.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것은 의상실 찻집 레스토랑 한식당이다. 여기에 와인바 치과 호텔에 이르기까지 한옥에 둥지를 트는 추세다. 김영사와 로그인투어 등은 북촌 한옥에 사옥을 두고 있다.한옥 레스토랑 중에서는 인사동의 민가다헌, 삼청동의 두가헌, 레시피, 카델루포 등이 유명하다. 이들은 대부분 한옥의 멋스러움을 그대로 살리면서 단정하고 세련된 서양식 인테리어를 가미,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특징이다.민씨 일가의 찻집이라는 뜻의 민가다헌(閔家茶軒)의 경우 원래 명성황후의 친척인 민익두 대감이 살던 집이다. 지난 2001년 와인나라 이철형 대표가 인수, 현관을 내고 복도로 방과 마루를 길게 연결해 레스토랑으로 바꿨다. 지금은 외국인 접대 장소로 인기가 높다.가회동에는 한옥 치과도 있다. 깔끔하게 개량한 한옥 방을 진료실로 꾸며 색다르면서도 편안한 공간으로 이름이 높다.경주에선 한옥 특급호텔이 문을 열었다. 경주시 신평동의 라궁(羅宮)이다. 신라 궁궐을 뜻하는 라궁은 삼부토건이 지은 신라밀레니엄파크 안에 있다. 1만6525㎡(옛 5000평) 부지에 회랑으로 연결된 한옥 독채 16채가 들어서 있다. 라궁의 96㎡ 스위트형 한옥 숙박료는 46만 원선. 아침 식사, 저녁 식사, 신라밀레니엄파크 입장료 등이 포함된 가격이다.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새 집을 한옥으로 지으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하지만 한옥을 전문적으로 짓는 업체를 찾기가 어렵고 콘크리트 건물과 달리 비용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이는 낡은 한옥을 개·보수할 때도 마찬가지다.우선 한옥 시공 전문 업체를 고르는 게 중요하다. 한옥은 일반 건물과 달리 거의 모든 공정이 사람의 손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특별한 전문성이 요구된다. 콘크리트로 건물을 지을 때는 철근을 엮어서 거푸집을 만들고 레미콘을 부으면 기초공사가 끝나지만 한옥은 그렇지 않다. 거푸집 대신 나무를 사용하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세밀한 과정을 이어나가야 한다.한옥 시공 전문 업체에 대한 정보는 문화재청 홈페이지(www.ocp.go.kr)에서 구할 수 있다. 또 문화재청에 등록된 고건축 전문 설계사무소를 통해 소개받는 방법도 있다.한옥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비용’. 한옥 100여 채의 설계와 시공을 담당해 온 김장권 북촌HRC 대표는 “한옥은 집의 설계 양식, 형태, 자재 등에 따라 비용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므로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전제하고 “일반 주택을 짓는 것보다 비용이나 공사 기간이 2배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만일 평균 수준의 자재와 설계로 짓는다면 3.3㎡당 1000만 원선을 웃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일반 주택의 건축비가 3.3㎡당 300만~400만 원인 점을 감안하면 2배 이상 높은 셈이다. 개·보수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3.3㎡당 700만 원선을 잡아야 한다.한옥의 건축비용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인건비다. 모든 공정에 사람 손을 타는 데다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이다. 나무 등 자재비 비중도 높다. 기둥으로 쓰는 나무를 향이 좋은 금강송(춘향목)으로 사용한다면 비용이 또 달라질 수 있다.서울시에서는 북촌가꾸기사업을 통해 등록된 한옥에 대해 개·보수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사업 범위는 종로구 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팔판동 일대 107만 6302m2의 한옥이다. 이 지역의 한옥 소유자 또는 한옥 신축 예정자가 등록 신청을 하고 비용 지원을 신청하면 심의를 거쳐 수선 등에 소요되는 비용 최대 3000만 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융자금은 최대 2000만 원이다.취재=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사진=이승재 기자 fotoleesj@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