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지는 엔고 주름살
엔화 가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엔화는 지난 3월 13일 달러당 100엔선을 깨고, 두 자릿수에 진입했다. 1995년 이후 거의 13년 만에 최저치다.최근 가파른 엔고는 미국 경기 침체 우려로 인한 달러 폭락이 주요인이다. 미국 경제에 불안을 느낀 투자자들이 달러를 시장에 내다 팔면서 상대적인 엔화 가치가 급등하고 있는 것. 달러 투매는 엔화뿐만 아니라 국제 유가와 금값 등 상품 가격도 밀어 올리며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물론 지금의 엔고가 ‘진짜 엔고’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달러에 대해서만 값이 올랐지 유로화 등 다른 나라 통화에 비해선 엔화가 여전히 약세라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산업계 전반엔 엔고와 국제 상품 가격 급등이 일본 경제 전반에 주름살을 줄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2004년 이후 미지근한 회복을 이어온 일본 경제가 활짝 꽃을 피워 보기도 전에 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3월 17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한때 달러당 95엔대까지 하락했다. 유로화도 한때 1.589달러까지 올라 1999년 유로 출범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미국 달러로부터 이탈한 글로벌 투자 자금들이 엔과 유로로 유입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달러를 버린 돈들은 엔화나 유로화뿐만 아니라 원유 금 등 상품시장으로도 흘러 들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국제 유가와 금값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뉴욕 선물시장에서 금값은 3월 14일 온스당 1000달러를 돌파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국제 유가도 3월 13일 사상 처음으로 배럴당 110달러를 넘어 111달러까지 올랐다. 상품시장엔 헤지 펀드도 가세하면서 투기판 양상을 띠고 있기까지 하다.최근 상품 가격은 실제 수급 원리와 따로 움직이고 있다. 현재 미국의 휘발유 재고는 작년 11월부터 18주간 연속 증가해 전년 동기 수준을 10% 웃돈다. 과거 5년간 추세를 봐도 두드러지게 높은 수준이다. 월드골드카운슬에 따르면 금의 최대 소비국인 인도의 작년 4분기(10~12월) 금 수요는 전년 동기에 비해 64% 감소했다. 세계 전체적으론 17% 줄었다. 석유 재고가 늘고, 금 소비가 줄어드는 데도 유가와 금값이 폭등하는 건 유동성 장세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상품시장에 돈이 몰리는 건 통계로도 확인된다. 국제 상품시장에서 운용되는 총자산 잔액은 작년 말 15조 엔 안팎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 17조~18조 엔으로 불었다. 세계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금상장투자신탁(ETF)의 투자 잔액도 현물 금으로 환산하면 800톤을 넘었다. 과거 2년 사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세계 상품시장의 규모는 약 10조 달러라는 게 정설. 16만 톤에 달하는 금의 지상 재고(약 5조 달러)와 원유 금속 농산물의 연간 생산량 등을 모두 합친 것이다. 이 정도 규모는 세계 주식·채권 시가총액(약 100조 달러)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주식·채권시장의 자금 몇 %만 상품시장으로 이동해도 상품 가격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엔화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의외로 담담하다. 재무성은 엔화 가치가 하루에 달러당 3~5엔씩 급등해도 팔짱만 끼고 있다. 과거 같으면 ‘외환시장에 개입해 달라’며 정부에 아우성을 쳤을 재계도 비교적 조용하다. 일본 재계 단체인 게이단렌의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캐논 회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일본 산업도 ‘10년 불황’을 거치며 단련돼 저항력이 강해졌다”고 말했다.그런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배경엔 지금의 엔고가 사실은 ‘진짜 엔고’가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최근 엔화 강세는 달러의 ‘나홀로 폭락(한국 원화 제외)’에 따른 것으로 다른 통화까지 감안하면 지금의 엔화 가치가 그리 높은 건 아니란 분석이다.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01엔대였던 1995년 11월과 지금을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시에 비해 엔화 가치는 현재(99엔대) 2% 절상됐다. 그러나 유로화에 대해선 15%, 영국 파운드화엔 22%, 캐나다 달러에는 26%씩 절하된 상태다. 달러를 제외한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해선 엔화가 1995년에 비해 여전히 약세란 얘기다.일본은행이 계산하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1973년 3월=100)도 지난 2월 99.5로 1995년에 비해 30%이상 낮다. 실질실효환율은 주요 교역국 통화에 대한 자국 통화가치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환율. 일본 재무성 간부가 “1990년대와 비교하면 지금은 엔고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일본 기업들이 ‘10년 불황’을 거치며 체질을 강화한 것도 한 이유다. 일본의 주력 기업들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원가 절감을 통해 웬만한 엔고엔 버틸 수 있는 경쟁력을 갖췄다. 일본 상장기업들은 엔화 강세가 지속됐던 작년 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에도 경상이익이 전년에 이어 또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전망이다. 하야시 야스오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이사장은 “일본 기업들은 1990년대 중반 달러당 80엔에도 버텼다”며 “지금 정도의 엔고가 일본 기업들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이 때문에 앞으로 엔고가 더 진행되더라도 일본 정부는 외환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예상이다.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약 1조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는 일본 재무성은 2004년 초 이후 지금까지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두 자릿수에 진입한 엔화를 놓고 일본 기업들이 여유만 부리고 있는 건 아니다. 가파른 엔고로 인한 일본 경제 전반의 주름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니혼게이자이신문이 최근 일본 주요 기업 사장 1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23.8%의 응답자가 ‘국내 경기가 악화되고 있다’고 응답했다. 작년 12월 조사 때의 경기 악화 답변(7.5%)보다 3배 늘어난 것.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는 엔화 강세와 미국 경기 후퇴 등에 대한 불안감이 배경으로 꼽혔다. 일본 기업들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불안 요소는 미국 경기 동향이다. 응답자의 94.9%가 미국을 ‘경기 후퇴 우려가 가장 강한 국가’로 꼽았고 76.9%는 ‘미국 경기가 악화되고 있다’고 답했다.특히 수출 기업들의 우려가 크다. 일본의 대표 기업인 도요타자동차는 엔화 가치가 1엔 오를 때마다 약 350억 엔의 이익이 날아간다. 혼다도 200억 엔가량 타격을 입는다. 소니와 마쓰시타 샤프 등 주요 전기전자 업체들은 1엔 오를 때마다 20억~60억 엔 정도씩의 이익 감소를 감내해야 한다.노무라증권금융경제연구소는 2008년도 기업 실적 전망과 관련, 경상이익이 6.4% 증가에 그칠 것이라고 최근 예상했다. 작년 말 내놓은 8.7% 신장에서 2.3%포인트 낮춘 것. 엔화 급등은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도 끌어내린다. 일본 정부는 금년 실질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0%로 제시했었다. 그러나 예상 환율이 달러당 111.20엔이어서 수정이 불가피하다.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수출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는 엔화 가치가 10엔 오르면 실질 GDP 성장률이 0.4% 떨어지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문제는 상품과 유로·엔화로의 ‘글로벌 머니 러시’가 좀체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베어스턴스 사태 등 금융 불안을 수습하기 위해 구제 금융을 지원하고 큰 폭의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시장에 돈을 더 공급한다는 얘기다. 그 돈들은 다시 상품시장과 유로·엔화로 흘러갈 게 뻔하다.경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미국 FRB의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이 경기 침체는 치유하지 못하면서 물가 상승만 야기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무라증권의 우에노 다이사쿠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경기 회복과 금융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이 시장에 돈을 풀면 풀수록 상품 가격과 유로·엔화 가치는 올라갈 것”이라며 “자칫 자금 공급이 경기는 살리지 못하고 물가만 올려놓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