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시골 농사꾼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셨고 청년 시절에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신 분이다. 어릴 적 힘든 농사일을 도맡아 하고 시대적인 큰 변화를 겪으면서 막연하지만 새로운 뭔가를 시도하려고 아버지가 뛰어든 일은 그 당시 지엠시(GMC) 트럭의 조수였다. 조수로 따라다니며 차량의 구조와 운전 방법을 이론이 아닌 경험만으로 숙지하고 배우며 시험을 거치지 않고 운전면허를 인정받는 경우였다고 한다.그 당시만 해도 전쟁 직후여서 차량도 많지 않았고 운전이라는 직업이 생소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벌이는 괜찮았으나 “큰집이 잘돼야 집안이 편안하다”며 운전으로 수입이 생기면 큰집부터 챙기곤 하셨는데 이것이 어머니를 늘 불편하게 했으며 가정 형편은 전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더구나 운전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시도 때도 없이 ‘딱지’라고 하는 벌금이 부과되다 보니 경제적으로 일정한 수입이 보장될 수도 없었다. 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각지로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라서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하며 성장한 것으로 기억된다.내가 사춘기를 지날 때 아버지는 네 형제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머나먼 사막의 나라 중동으로 아예 취업 이민을 가셔서 10년 넘게 별거 생활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인생은 자식들의 재롱이나 어리광, 성장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반 토막 인생을 사셨던 것 같다.내가 성년이 된 후 귀국한 아버지는 여전히 시내버스 운전을 하며 나이 들고 피로에 지치고 백발이 되어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용기와 사랑을 갖고 살아온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늦게나마 아버지의 존재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한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한 날도 많지 않았지만 함께한 이후에도 말수가 많지 않았던 아버지. 자식 사랑의 표현이 서툴러 가슴으로만 품고 평생을 일벌레로만 살아온 모습에서 아버지에게 숨어 있는 순수한 자식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정년퇴직의 나이가 되어 시내버스 운전을 못하게 되자 마을버스로 자리를 옮겨 3년 넘게 운전을 할 정도로 손에서 일을 놓지 않던 아버지였다. 회사에서 젊은 사람들도 먹고 살게 해달라는 요구에 마지못해 일을 그만둔 뒤로도 동네의 고장 난 자전거들을 수리해 손자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셨다. 아들을 위해 건강에 좋다는 은행이나 다시마 같은 약재들을 모아 놓았다가 나누어 주시는가 하면, 전기배선을 연결하거나, 보일러 모터 수리, 하수구 배관을 손보는 등 소일거리를 찾아나서시던 아버지의 부지런함이야말로 내게 물려주신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싶다.요즈음 나는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다. 최근 내 아들놈의 주장이 매우 강해졌고 한번 우기기 시작하면 끝을 본다. 그런 모습 속에서 과거의 나를 보는 듯하다. 마흔 살이 넘도록 나 혼자 큰 줄 알고 아버지께 따지던 내 모습의 부끄러움 속에서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을 느끼곤 한다. 이것은 내가 젊었을 때 갖지 못했던, 아버지로 살아가며 느끼는 아버지와의 교감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더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에 대한 흠모의 정은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지난 2월, 아버지는 75세 생신을 맞이하셨다. 온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동네의 한 식당에서 하게 됐는데 손자들이 꽃다발과 생신 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순수하고 인자하신 표정이 매우 행복해 보였다. 생신 축하연을 끝내고 댁까지 모셔다 드리는 차 안에서 “고맙구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속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해요’라고 되뇌며 지금이라도 내가 먼저 외로움을 달래시도록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서야겠다는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져본다.1963년생. 89년 중소기업 BTC정보통신에 입사한 뒤 2003년 대표이사에 올랐다. 디자인과 감성 품질에 공을 기울인 히트상품 ‘제우스’ 모니터 등으로 대기업이 장악한 디스플레이 시장에 바람 몰이를 하고 있다.김성기·BTC정보통신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