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1. 폭발하는 세계 전력 시장2. 한국전력의 힘, 필리핀을 밝히다3. ‘빅 마켓’ 중국의 혈투오전 8시 필리핀 수도 마닐라를 출발해 남부 고속도로에 올랐다. 고속도로라고 하지만 도로 사정은 좋은 편이 아니다. 한쪽 방향을 완전히 막아 놓고 공사를 하는 곳도 있고 차로를 제대로 지키는 차가 거의 없는 것은 마닐라 시내와 마찬가지다. 목적지는 일리한가스복합발전소. 2002년 완공된 필리핀 최대 발전소다. 이 거대한 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일을 한국전력이 맡았다. 동행한 한전 필리핀법인 박상돈 부장은 “일리한발전소에서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 전력의 12%를 생산해 낸다”고 설명해 준다. 박 부장은 발전소 건설 때 현장 근무를 했다는 이유로 안내를 맡았다.3월 중순인데도 기온은 벌써 섭씨 30도를 오르내린다. 습도가 80%를 웃돌아 더욱 무덥게 느껴진다. 마닐라 도착 후 사무실과 호텔, 차 안까지 24시간 에어컨을 켜대는 통에 머리가 아플 정도다. 필리핀은 3월이면 한여름 무더위가 시작된다고 했다. 박 부장은 “아무리 더워도 필리핀에서 보통 사람들은 에어컨을 마음대로 켜지 못한다”며 웃는다. 무엇보다 비싼 전기 요금 때문이다.필리핀은 일본 다음으로 전기 요금이 비싼 나라로 꼽힌다. 지역별로 배전 사업자가 달라 차이가 나지만 보통 kWh당 원화로120~200원 정도다. kWh당 76원인 한국보다 2배 이상 비싼 셈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344달러에 불과한 필리핀 국민들의 소득수준을 고려하면 실제 부담은 그보다 훨씬 크다. 필리핀에 진출한 기업들도 전기 요금을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들고 있을 정도다. 필리핀 정부가 해외 전력 회사에 적극적으로 시장을 연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차로 2시간을 달려 루손섬 남쪽 항구도시 바탕가스에 도착했다. 바탕가스는 한국으로 치면 울산공단에 해당하는 곳이다. 화학공장, 시멘트공장, 정유공장이 해안에 들어서 있다. 인구 30만 명이라지만 높은 건물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바탕가스 시내 한 호텔에서 일행을 마중 나온 일리한발전소 이기남 부장을 만났다. 예비역 대령 출신인 필리핀인을 대동했다. 발전소에서 고용한 ‘세이프티 컨설턴트’다. 이 부장은 “건설 공사를 할 때 실제로 발전소 인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며 잔뜩 겁을 준다. 지금도 군과 경찰이 발전소 외곽 경비를 선다는 것이다.해안을 끼고 난 산길로 들어서 또 1시간쯤 달렸다. 발전소 주변 지역은 필리핀 행정구역으로는 일리한 바랑가이에 속한다. 바랑가이는 한국의 면 단위에 해당한다. 발전소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고기잡이로 겨우 먹고 살던 고립된 어촌 마을이었다. 바탕가스 시내로 가는 교통 수단도 배가 유일했다. 하지만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마을 주민들의 삶도 많이 달라졌다. 전기가 들어오고 도로가 뚫렸으며 발전소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발전소 내 의무실은 상시 개방돼 있어 언제든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다.이 부장은 “발전소 자체적으로 매년 1억 원가량을 각종 지역 환원 사업에 쓴다”고 말한다. 공사 초기 활동하던 반군 출신이 지금은 발전소 보수를 맡은 한전KPS에 인부를 공급하는 인력회사 사장을 맡고 있다. 발전소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나자 이 부장은 “밤이 되면 거대한 굴뚝에 불이 켜진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라며 “주민들은 마치 ‘타이타닉호’ 같다고 말한다”고 일러준다.현재 일리한발전소에는 한전에서 파견된 8명의 한국인 직원과 101명의 필리핀 직원이 근무한다. 한전 직원들은 대부분 가족들을 마닐라에 두고 1주일에 한 번 오가는 주말 부부 생활을 한다. 발전소 반경 10km 이내에는 술집조차 없다고 하니 그야말로 군대 생활이나 마찬가지다. 내리쬐는 태양과 바다만 있을 뿐이다.일리한발전소 건설은 필리핀 정부의 국책 사업인 말람파야 천연가스전 개방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필리핀 서부 팔라완선 인근 해저에 가스전이 발견되자 이를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발전소를 짓기로 한 것이다. 심해에서 뽑아낸 천연가스를 장장 504km 해저 가스관으로 바탕가스까지 가져온 다음 탈황 처리해 두 곳의 대형 발전소(일리한, 산타리타)를 돌리는 야심찬 프로젝트다.1999년 국제 입찰에서 일리한발전소 사업을 따낸 한전은 자기자본 출자와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통해 7억9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3년 걸렸다. 일리한발전소는 BOT(건설, 운영, 이전) 사업이다. 한전에서 발전소를 짓고 완공 후 20년간 운영한 다음 필리핀 정부에 넘겨주는 방식이다. 운영 기간 동안 생산한 전기를 팔아 투자비를 회수하고 수익도 남겨야 한다. 황규병 일리한발전소 소장은 “필리핀 정부가 가스를 무상 공급하고 전력 구입을 보장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매우 높은 사업”이라고 말한다. 발전소만 효율적으로 운영하면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한전이 일리한 사업에 과감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말라야화력발전소라는 확실한 디딤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전은 마닐라 남동쪽 70km에 위치한 이 낡은 발전소를 1995년 인수해 성능 복구 공사를 끝내고 가동 중이다. 한전 역사상 해외 발전소 운영은 말라야발전소가 처음이다. 이 때문에 말라야는 ‘한전 해외 사업의 모태’로 불린다.벙커C유를 원료로 쓰는 말라야발전소는 1979년 완공된 필리핀전력공사(NPC) 소유 발전소였다. 1986년 1차 성능 복구 공사를 했지만 채 10년도 안 돼 다시 문제가 생기자 1995년 국제 입찰을 통해 ROMM(성능 복구, 운영, 유지 보수, 경영) 방식으로 한전에 발전소를 넘긴 것이다. 사업의 기본 구조는 일리한발전소와 유사하다. 발전소 성능 복구 공사를 하고 공사 기간을 포함해 15년간 운영한 다음 NPC에 되돌려 주는 형태다. 발전소를 새로 짓느냐, 기존 발전소를 인수하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한전에 인수된 말라야발전소는 고성능 발전소로 다시 태어났다. 신영호 말라야발전소 소장은 “처음 지어졌을 때와 비교해 설비 용량이 430MW에서 650MW로 크게 늘어났다”며 “필리핀 정부 입장에서는 건설비 투자 없이 220MW 발전소를 건설한 효과를 거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발전기 효율도 높아져 연간 2200만 달러의 연료비를 절감하는 성과도 거뒀다. 신 소장은 “필리핀 최초로 1년 무고장 운전을 기록한 곳도 바로 말라야발전소”라고 말한다. 한전은 말라야 사업에 해외 차관 등으로 2억 625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2006년 4월 이미 채무 상환을 끝낸 상태다. 그 이후 말라야발전소는 한전의 필리핀 사업 확대에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최근 필리핀 전력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전기요금이 높아 사업성이 좋다 보니 세계 주요 전력 회사들이 모두 명함을 내밀고 있다. 이강원 한전필리핀법인 사장은 “이제 필리핀 정부도 더 이상 정부 보증 발전소를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전력 시장 전망이 밝아 해외 전력사들이 공격적으로 발전소를 사들이고 있다”며 “한전은 공기업이란 특성 때문에 보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곤혹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한다. 필리핀은 지난해 31년 만에 가장 높은 7.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미국 최대 전력 회사 중 하나인 AES는 지난해 당초 예상된 6억5000만 달러를 훨씬 초과한 9억3000만 달러를 써내 마신록석탄발전소(600MW)를 손에 넣었다. 유럽 최대 에너지그룹인 수에즈도 지난해 말 칼라카석탄발전소(600MW)를 7억8659만 달러에 사들였다. 일본 업체들은 우회적으로 손쉽게 필리핀 시장에 진입한 경우다. 일본 마루제니와 도쿄전력은 팀에너지라는 합작 법인을 설립해 경영난으로 해외 자산 매각에 나선 미국 미란트의 필리핀 발전소들을 몽땅 인수해 단번에 필리핀 민간발전사업자(IPP) 1위에 올랐다.필리핀은 전력 산업 구조 개혁만큼은 한국보다 한발 앞서 있는 특이한 나라다. 2001년 ‘전력산업개혁법’을 재정해 경쟁 체제 도입과 민영화를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다. 국영 전력 회사인 NPC 발전 자산의 70%를 민간에 넘긴다는 내용이 그 안에 들어 있다. 필리핀 에너지부 이마 엑스콘데 전력국 부국장은 “NPC 발전 자산 매각이 42.6% 완료된 상태”라고 말한다. 필리핀이 IPP의 ‘천국’이 된 배경이다. 현재 필리핀 전체 전력 설비 용량의 76%를 IPP들이 차지하고 있다.필리핀은 1990년대 초 극심한 전력난을 경험했다. 전압 저하를 뜻하는 ‘브라운 아웃’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수요 증가에 맞춰 제때 발전소를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1970년대 중반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시작했다. 시공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똑같이 맡았다. 하지만 한국은 이후 원전을 잇달아 건설해 원자력 발전 대국으로 올라섰지만 필리핀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620MW 바탄원자력발전소 건설 공사가 마르코스 대통령이 ‘피플 파워’로 물러나면서 부패 스캔들과 환경단체의 반대로 1986년 중단됐다. 이 사장은 “전기를 1kW도 생산하지 못한 채 19억 달러가 넘는 투자비만 날린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떠안은 대외 채무는 두고두고 NPC와 필리핀 정부를 괴롭혔다. 여기다 전력난 해소를 위해 IPP에 유리한 조건으로 발전소 투자를 끌어들이다 보니 필리핀 국민들의 허리가 휠 지경이 됐다.한전은 필리핀 2위 IPP의 위상을 굳히고 있지만 나름대로 고민도 안고 있다. 효자 사업인 말라야발전소의 사업 기간이 2010년 종료되기 때문이다. 해외 전력 회사들의 공격적인 사업 추진으로 NPC 발전소 입찰에서도 고배를 마시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월 착공한 200MW 세부석탄화력발전소 건설 공사는 한전 필리핀 사업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7000여개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은 전체를 루손(북부), 비사야스(중부), 민다나오(남부) 등 3지역으로 나눠 각 섬들을 해저 전력 케이블로 연결해 놓았다. 이들 3지역은 각자 독자적인 전력 계통으로 운영된다. 이 때문에 전력 사정이 지역별로 차이가 난다.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은 2010~11년 전력 부족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더 심각한 곳은 세부를 중심으로 한 비사야스다. 이마 엑스콘데 부국장은 “비사야스는 이미 부분부분 전력 부족이 생겨 ‘옐로 얼럿’이 켜진 상태”라며 “이 때문에 한전의 세부발전소 건설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한전 세부발전소는 세부 남서쪽 22km에 위치한 살콘파워(현 SPC) 나가발전소 회처리장 부지에 지어진다. 2011년 완공되면 비사야스 최대 석탄화력발전소가 된다. 세부발전소는 기존 말라야발전소나 일리한발전소와는 사업 방식이 전혀 다르다. 필리핀 정부의 보증 없는 완전 상업 발전이기 때문에 원료 수급과 전력 판매를 한전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상당한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한전은 세부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살콘파워의 지분 40%를 2006년 인수했다. 발전소가 들어설 나가발전소 회처리장은 아직 부지 정리도 끝나지 않은 상태다. 현재 한전 파견 직원 5명이 나가발전소에서 내준 단층 건물에 입주해 사무실 정리 작업에 한창이다.나가발전소 노형권 부장은 “신청한 지 한 달이 됐는데도 인터넷이 아직도 설치되지 않았다”며 “독촉 전화를 하는데도 지쳤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이들에게 ‘관광 천국 세부’는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최병일 세부발전소 소장은 “공사가 끝나면 꼭 다시 오라”며 환하게 웃었다.마닐라·일리한·말라야·세부(필리핀)=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