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2년여 만에 가입자가 50만 명을 돌파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퇴직연금 제도가 뿌리내리고 있다는 의미로, 고령화 시대를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는 퇴직연금 도입이 보다 가속화될 것이다.”(장의성 노동부 근로기준국장)퇴직연금이 도입된 것은 2005년 12월의 일이었다. 당초 관계자들은 기존 퇴직금에 대한 손비 인정이 대폭 축소되는 2010년 무렵이나 돼야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도입 초기 시장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새로운 황금 시장이라며 잔뜩 기대했던 금융 업계도 다소 맥이 빠지는 분위기였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장은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퇴직연금 시장이 제대로 불붙기 시작한 것 아니냐며 업계는 반색하고 있다. 업계에선 향후 10년 안에 시장이 지금의 수십 배에 달하는 100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퇴직연금 시장이 갈수록 피치를 올릴 수 있는 배경은 무엇보다 ‘은퇴’와 ‘노령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데다 은퇴 연령이 낮아지면서 노후 대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고 이것이 퇴직연금에 발길을 돌리는 동인이 되고 있다.이러한 변화는 퇴직연금 제도의 근본 취지와도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광범위하게 유지되고 있는 퇴직금 제도는 은퇴 자금으로 활용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중간정산이 가능한 데다 직장을 옮길 때마다 꼬박꼬박 정산이 되기 때문이다. 또 정산 받은 돈을 재투자하기보다 그때그때 소비하는 경향이 높다. 더구나 회사가 부도라도 나면 애써 적립한 퇴직금을 온전히 받기 힘들다. 애당초 은퇴 자금이 되기엔 무리가 있는 셈이다.퇴직연금은 크게 둘로 나눠진다.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이 그것이다. 전자는 받을 수 있는 연금의 액수를 미리 정해둔다. 적립금 운용 수익률이 낮은 경우엔 가입자가 속한 기업이 부족한 돈을 채워준다. 가입자의 은퇴 전 수입을 근거로 연금액이 정해지므로 연봉이 많고 안정적인 대기업에 유리하다.DC는 적립금 운용 실적에 따라 연금액이 정해진다. 성적이 좋으면 많이 받을 수 있지만 나쁘면 연금액이 적어진다. 투자 성격이 강한 셈이다. 어떤 상품에 투자할지는 가입자가 선택하기 때문에 가입자의 안목이 중요하다. DB를 택할 경우 연금액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소규모 사업장에 보다 어울리는 제도다.DB와 DC의 차이는 가입자 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월 말 현재 가입 사업장은 3만1339개인데 이 중 DB를 선택한 곳은 16.5%에 해당하는 5176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입자 수를 보면 전체 55만여 명 가운데 28만여 명이 DB를 택했다. 종업원 수가 많은 대형 사업장이 DB를 선호한 결과다.퇴직연금 상품은 매우 다양하다. 크게는 은행 예금처럼 금리를 기반으로 운용하는 상품과 투자의 개념으로 접근한 펀드 상품으로 구별된다. 어떤 상품을 택할지는 전적으로 가입자의 성향과 판단에 달려 있다. 초과 수익을 바란다면 실적 배당형(펀드) 상품을 택하면 되고 보수적인 성향이라면 원리금 보장형(예금) 상품을 고르면 된다.퇴직연금 투자의 성패를 좌우하는 변수는 여러 가지다. DB형과 DC형, 예금형과 펀드형 등 가입자들의 선택에 따라 은퇴자금은 크게 차이가 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업자를 고르는가에 달려 있다. 사업자의 역량에 따라 자산의 안정성과 수익률이 적지않이 달라지기 때문이다.시장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보험사 증권사 은행 등 금융업계가 모두 달려들고 있다. 별도의 사업부를 신설하는 것은 보통이고 관련 연구소를 개설하는 곳도 적지 않다.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숱하게 설명회를 열고 인재를 영입하고 관련 상품을 개발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올해 사업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지 못하면 퇴직연금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렵다는 절박감도 감지된다.현재까지 시장의 강자는 보험업계다. 퇴직보험을 운용한 경험이 초기 시장 선점에 유리하게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은행과 증권업계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업계 간 점유율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상태다. 지난해 은행이 드라이브를 걸었다면 올해는 증권업계가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지난 1월 말 기준으로 생명보험사는 전체 시장의 50%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은행이 40% 남짓, 증권사가 약 10%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특히 주목받는 사업자는 단연 삼성생명이다. 전체 시장의 30%, 보험업계의 60%가량을 유치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적인 재무 구조와 뛰어난 수익률 등이 ‘질주’의 비결이란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퇴직보험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이미 퇴직연금 사업에 필요한 인프라와 전문 인력, 고객 기반이 확보돼 있던 것도 성장의 발판이 됐다.권병구 삼성생명 퇴직연금연구소장은 “퇴직연금 사업은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 마진은 적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가 이뤄져야 생존할 수 있다”며 “차별화된 서비스와 영업력을 앞세워 현재 8400억 수준인 적립금을 올해 안에 2조 원까지 늘려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퇴직연금 사업자들은 각자의 장점을 전면에 내세워 ‘간택’을 구하고 있다. 은행은 안정성을 최우선에 두고 있는 반면 증권업계는 장기적으로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주식 투자가 바람직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보험은 은행과 증권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다. 수익 측면에서 지금까지는 증권업계의 수익률이 가장 높다. 주식시장이 지난 수년간 장기 상승 추세에 있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식시장은 등락이 있게 마련이어서 이러한 추세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최근의 금융 불안을 감안하면 단기간의 높은 수익률은 신기루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