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상가 패러다임이 바뀐다
서울 명동 입구 최고 요지에 있는 대형 상가 H는 지난 2006년 화려하게 개장했지만 1년 남짓 만에 영업을 중단했다. 분양 당시 개발 회사는 미국 3대 백화점 J사 입점 확정, 지하 1~2층 명동 지하철과 연결, 명품 백화점 입점 등의 조건을 내걸었지만 모두 사실과 달랐다. 당시 분양가는 9.9~ 16.5㎡당 1억6600만~2억5000만 원. 현재 700여 명의 투자자들은 영업을 하고 싶어도 못하고 점포를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는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 일부는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경매로 넘어갔지만 이마저 유찰을 거듭하며 값만 떨어지고 있다.H같은 분양식 상가는 전국에 200여 개에 달한다. 층별로 업종을 정해 일정 규모 점포를 투자자에게 분양하는 방식으로 건설 자금을 확보했다는 게 공통점이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상업지역 개발의 표본으로 떠오르면서 동대문 명동 강남역 등 노른자위에 잇달아 들어섰지만 결과는 대부분 ‘참패’다. 수백 명이 제각각 점포를 운영하면서 차별화된 상권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이에 따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슬럼화의 수순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사기 분양 사건의 장본인으로 뉴스에 오르내린 곳도 있다.이런 분양식 상가가 많은 문제점을 낳는 사이 상가 시장에선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대형 상가를 분양 상품이 아닌 운용 자산으로 보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개발 회사가 상가를 직접 소유 및 운영하면서 임대 수익을 창출하는 게 대표적이다. 이 경우 과학적인 상권 분석과 이를 토대로 한 MD 구성, 마케팅 활동으로 높은 집객 효과와 전체 상가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효과가 있다. 쇼핑몰 개발에 경험이 많은 외국계 부동산 컨설팅사들과 손잡았다는 점도 눈에 띈다. ‘쇼핑(Shopping) 대신 몰링(Malling)’을 앞세우는 쇼핑몰들이 새 트렌드의 주인공이다.대형 상가 시장의 새 패러다임을 열고 있는 쇼핑몰로는 부천의 디몰(옛 로담코프라자), 올 연말 준공 예정인 서울 신림동의 포도몰, 서구식 돔 구조 스트리트 쇼핑몰인 일산의 웨스턴돔 등이 손꼽힌다. 기존 쇼핑몰 중에선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 용산 현대아이파크몰, 센트럴시티 등이 해당된다.현재 계획 중인 쇼핑몰은 이보다 훨씬 많다. 특히 외국계 부동산 컨설팅사와 글로벌 금융회사의 지원과 투자로 그 수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실제로 리먼브러더스가 동대문 라모도 쇼핑몰을, 미국계 펀드인 아라인베스트먼트가 남대문 메사 쇼핑몰을 인수했고 유럽의 쇼핑몰 시행사인 레디마그룹도 한국 진출을 앞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부산 센텀시티, 여의도 IFC빌딩, 서울 영등포 경방 타임스퀘어, 신도림 대성 디큐브시티 등도 복합 쇼핑몰 형태로 개발이 예정돼 있다. 줄잡아 2~3년 후에는 국내 유통시장에 쇼핑몰 전성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예상이다.부천에 있는 디몰(The Mall)은 리테일 전문가가 직접 통제하는 쇼핑몰이 어떤 파워를 갖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디몰은 개별 분양 없이 100% 임대만으로 운영되는 쇼핑몰이다. 다국적 부동산 투자회사 ING REIM에서 투자하고 운영하는 이 쇼핑몰에는 현대백화점 중동점, 멀티플렉스 CGV부천 등의 대형 업체와 110여 개의 외식, 문화, 의류, 병원 등이 들어서 있다.현재 이 쇼핑몰의 공실률은 3% 정도에 불과하다. 빈자리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2년 전 오픈 초기에 공실률이 20%를 넘어서자 쇼핑몰 측은 리테일 및 부동산 전문가를 COO(최고운영책임자)로 영입해 기존 입점업체와 고객의 동선을 새롭게 구성했다. 이 때 주부들의 주중 방문을 늘리기 위한 피트니스센터, 연회 전문 브랜드인 리더스클럽 등이 입점했다. 또 입점 업체들을 관리하는 테넌트매니저(Tenant manager)를 두고 입점 업체의 매출 분석, 영업 및 경영 관련 컨설팅을 비롯해 인테리어, 디스플레이 등 사소한 것까지 챙기고 있다. 이런 철저한 영업 관리를 통해 매년 20~30%의 영업이익 성장을 계속 하고 있다. 디몰의 전경돈 상무는 “입점 업체들이 영업을 더 잘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쇼핑몰의 임무”라면서 “외식, 의류 등은 입점 희망자가 대기하고 있다”고 밝혔다.서울 신림동에 짓고 있는 15층 높이의 포도몰 역시 개발 회사가 소유와 운영을 함께 하는 완전 임대형 쇼핑몰이다. 미국의 금융지주사 와코비아가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담당하고 미국계 부동산 컨설팅 업체인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가 상업시설 임대를 위한 리테일 에이전트로 참여하고 있다. 포도몰은 프로젝트 개발 비용 전체를 미리 투자 받고 준공 후 개발 회사인 한원건설이 사업권을 유지하면서 쇼핑몰을 운영해 나가는 비즈니스 모델을 택했다. 한원건설의 강석주 이사는 “임대 유치가 순조롭게 진행 중이며 교보문고, 롯데시네마 등이 이미 입점을 확정했다”면서 “열린 공간의 쇼핑몰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지난해 일산 장항동에 문을 연 웨스턴돔은 공급 방식이 분양 형태의 ‘한국식’이었지만 모습이나 운영은 ‘서구식’ 쇼핑몰의 장점을 살렸다. 개발 회사는 일산 라페스타로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청원건설이다. 이 회사 배병복 회장은 ‘새로운 문화를 짓는 사람들’이라는 슬로건으로 한발 앞선 부동산 개발 모형을 선보여 왔다.웨스턴돔은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돔 구조의 스트리트 쇼핑몰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을 눈과 비를 막을 수 있는 지붕으로 씌워 사계절 언제나 쇼핑을 즐길 수 있게 한 게 특징이다. 이미영 마케팅실장은 “미국 유럽 동남아의 세계적 쇼핑몰을 벤치마킹한 후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해 만든 쇼핑몰”이라고 소개하고 “각종 공연, 이벤트를 통해 가족, 연인들이 쇼핑몰 전체를 즐기는 ‘몰링’을 실현하고 있다”고 말했다.쇼핑몰이 대형 상업시설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이에 따른 파급 효과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 이미 외국계 부동산 컨설팅사와 글로벌 금융사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새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돈 상무는 “디몰이 한국적 쇼핑몰의 케이스 스터디 대상으로 자주 채택된다”면서 “파이낸스 전문가, MD 등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라(ZARA), H&M 등 쇼핑몰 출점을 원하지만 적합한 입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해외 유명 브랜드가 대거 국내 진출을 검토할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쇼핑몰은 부동산 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도 지지를 받고 있다. 한원건설 강석주 이사는 “분양식 상가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확인됐다”면서 “최적의 상업 환경을 만들어 운용 수익을 늘리고 결과적으로 부동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 쇼핑몰을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전 세계적인 상업시설 트렌드는 복합화, 대형화로 요약된다. 국내에 일고 있는 쇼핑몰 개발 움직임도 같은 맥락이라는 진단이다. 대형 쇼핑몰에서 놀이와 여가, 쇼핑을 즐긴다는 의미의 ‘몰링’ 역시 마찬가지다. 황점상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상무는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쇼핑몰들은 선진형 상업시설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면서 “개별 분양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해 온 대형 상가들은 일괄 매각 또는 위탁 운영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 상무는 또 “조만간 서울 수도권 대형 상가를 중심으로 완전 임대형 쇼핑몰로의 전환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