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신 몸된 사무라이본드

지난 3월 5일 오후 일본 도쿄 시내 테이코쿠(제국)호텔. 글로벌 투자은행인 UBS증권 주관으로 한국 기업 투자 설명회가 열렸다. 100여 석 규모의 설명회장은 일본 투자자들로 북적댔다. 우리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농협중앙회 주택공사 수자원공사 한국수력원자력발전 대전광역시 신세계 등 9개사가 참여한 이 설명회는 사무라이본드(엔화 표시 채권) 발행을 위해 위한 로드쇼였다. 한국 기업들이 채권 발행을 일본 투자가를 대상으로 공동 투자 설명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여파로 해외 자금 조달이 빡빡해진 한국 기업들이 일본의 사무라이본드 발행 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최근엔 LS전선이 100억 엔(약 930억 원) 규모의 2년 만기 사무라이본드 발행에 성공했다. 국내 제조업체 중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하기는 LS전선이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현대캐피탈 등 비교적 신용 등급이 좋은 금융회사들만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해 왔다.사무라이본드 시장이 각광받고 있는 건 자금 조달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미국과 유럽의 채권시장이 경색돼 있는 반면 일본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어 투자자들의 자금 여력이 있다. 이 때문에 올 들어 사무라이본드 시장엔 세계적인 금융회사들도 몰리고 있다.호주의 4위 은행인 웨스트팩은 지난 1월 처음으로 일본 금융시장에서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했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도 최근 사무라이본드 발행을 통해 약 1400억 엔을 조달했다. 모건스탠리는 2년여 만에 502억 엔의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했다.◇= LS전선의 최근 사무라이본드 발행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국제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단독 주간사로 일본 채권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BBB+’의 낮은 신용 등급으로 보수적인 일본 투자자들을 대거 모집한 것은 이례적이란 평가를 받았다.LS전선이 100억 엔 규모의 2년 만기 사무라이본드 발행에 성공한 것은 지난 3월 3일. 발행 금리는 엔 리보(Libor)에 2.2%포인트의 금리가 더해진 수준이다. 시장 관계자는 “낮은 신용 등급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동성이 높아진 최근 일본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괜찮은 가격”이라고 평가했다.더구나 한국의 제조업체가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하기는 LS전선이 처음이다. 보수적인 일본 투자자들 입장에서 신용 등급도 높지 않은 낯선 한국 기업이 발행하는 채권을 산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렇지만 투자자들의 주문 신청을 받은 결과는 의외였다.LS전선이 일본 재무성에 신고한 사무라이본드 발행액은 100억 엔. 그러나 투자자들의 신청 수량은 150억 엔에 달했다. LS전선 관계자는 “처음 발행을 준비할 때부터 실패할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며 “그러나 결과적으로 150억 엔의 주문이 몰리면서 투자자를 선별해야 했다”고 전했다.3월 5일 열린 한국 기업 공동 투자 설명회에도 일본 투자가들의 관심이 높았다. 이날 설명회엔 리소나은행 니혼생명 스미토모은행 등 일본의 기관투자가 60곳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들 중 상당수 투자가들은 설명회 다음날인 6일과 7일 한국 기업들과 일대일 비공개 면담을 갖기도 했다.UBS 서울지점의 김수미 홍보이사는 “일본에서 처음 개최된 한국 기업의 공동 채권 투자 설명회이기 때문에 일본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신인도를 재부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번 설명회에 참석한 기업들은 이르면 올 상반기나 연내에 일본에서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해 엔화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다.올해 한국 기업들이 사무라이본드를 통해 조달할 자금 규모는 3000억 엔에 달할 것이라는 게 UBS증권 서울지점의 추정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피해를 본 미국의 금융사를 포함해 해외 유수 금융회사들도 자금 조달 창구로 사무라이본드 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호주의 4위 은행인 웨스트팩은 지난 23일 처음으로 일본 금융시장에서 사무라이본드를 선보였다. 270억 엔 규모의 5년 만기 사무라이본드를 1.54% 고정금리로 발행하고 500억 엔 규모의 5년 만기 변동금리 사무라이본드를 리보 금리에 0.53%포인트 가산해 발행했다.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도 183억 엔 규모의 사무라이본드를 2.11%의 고정금리에 발행했다. 골드만삭스는 변동금리 사무라이본드의 경우 이보다 10배 많은 1302억 엔어치를 발행했다. 모건스탠리도 2년여 만에 502억 엔 규모의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하기도 했다.국제 금융회사들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 인하 기조와 함께 달러 약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자 달러가 아닌 대체 통화 채권으로 갈아타고 있는 것. 특히 일본은 상대적으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의 타격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아 주목받고 있다. UBS증권의 니콜라스 로스 채권시장 수석은 “일본 투자자 대부분은 서브프라임 위기에도 투자 이익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사무라이본드 투자에도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금리가 낮은 일본 시장에서는 조금만 금리를 높여도 투자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도쿄 시장에선 만기가 중장기이고, 적용 이자율은 단기 시장이자율을 반영하도록 설계된 변동금리부사채가 각광받고 있다. 변동금리부사채의 발행자는 시장금리가 낮아질 경우 이익이다. 이를 매입하는 투자자들은 금리가 오를 때 이자소득이 늘고, 대체로 최저 이율이 설정돼 있어 시장금리가 크게 떨어져도 일정 정도의 이자는 보장받을 수 있다. 호주의 웨스트팩과 골드만삭스가 발행한 사무라이본드도 모두 변동금리부사채 발행 비중이 고정금리부사채보다 컸다.골드만삭스 관계자는 “올 초 이후 일본에서의 수익률이 하락 압력을 받자 높은 이자를 추구하는 금융회사들은 변동금리부사채 사무라이본드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기업에 투자를 늘리고는 싶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지난 5일 한국 기업 투자 설명회에 참석했던 도쿄해상자산운용의 안도 마유미 펀드매니저는 기자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는 “일본어로 된 기업 뉴스나 자료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나마 영어로 된 자료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수개 기업에 한정돼 있다”며 “투자처를 다변화하기 위해 한국 기업으로 눈을 돌리려고 해도 아는 게 없으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일본 투자가들은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 정보에 목말라 있다. 사무라이본드 발행을 위해 우리은행 등 한국 기업 9곳이 공동 참여해 투자 설명회를 연 것도 사실은 일본 투자가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UBS증권 서울지점 한종연 전무는 “욘사마는 알지만 한국 기업은 잘 모른다며 일본 투자자들이 투자 설명회를 열어 달라고 요청해 행사를 주선했다”고 말했다.사실 일본에서 한국 기업 정보를 제공하는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의 주요 증권사들이 도쿄에 진출했지만 정식 지점으로 활동하는 곳은 현대증권 한 곳뿐이다. 나머지는 연락 사무소일 뿐이다. 일본에 한국 기업과 주식을 선전하고 팔 수 있는 시스템이 허술한 것이다. 작년 말 기업설명회(IR)를 위해 도쿄에 왔던 박병원 우리금융지주회장은 “일본 투자가들이 한국을 마치 소 닭 보듯 하더라”며 “그동안 한국이 너무 일본에 무심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한국 입장에서 일본은 기술도 그렇지만 돈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일본의 개인 금융자산은 1500조 엔(약 1경4000조 원)이 넘는다. 이 돈들이 초저금리의 일본에선 투자처를 찾지 못해 세계를 떠돌고 있다. 심지어 남아프리카공화국에까지 투자하고 있다. 그중 1%(140조 원)만 한국으로 와도 주식시장(코스피) 시가총액(약 860조 원)의 16%를 넘는다.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금융회사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경제 협력 확대 등 한·일 관계의 새 시대를 열자는 희망적인 얘기가 쏟아지고 있다”며 “그러려면 양국 간 기업 투자 정보 소통의 인프라를 까는 것도 시급한 과제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