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희·에너지 관리공단 홍보과장
“초등학교 학급회장 선거에도 여풍(女風)이 거세게 불고 있다. 기존의 ‘회장은 남학생, 부회장은 여학생’이라는 구도가 깨지고 오히려 남학생보다 더 적극적으로 선거에 도전하는 알파걸들이 늘고 있다.” 엊그제 보도된 기사를 보면서 아버지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을 지내고 전학 온 학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별 재미없이 다니며 6학년이 되었을 때, 전교 어린이 회장을 뽑는다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출마를 강권했다. 선거를 앞둔 즈음에는 동네 뒷산에서 아이들 앞에서 발표할 내용을 연습시키시곤 했는데, 그 내용이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도 황당했다. 학교 앞 도로에 육교를 놓겠다는 공약(?)이었다. 건널목으로 건너기에는 넓은 4차로이기 때문에 육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초등학생 회장 선거에서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리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셨다. 결국 아버지의 과외 지도대로 마지못해 전교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창피를 무릅쓰고 발표했는데, 결과는 의외의 당선이었다. 남학생 회장, 여학생 부회장이라는 그전까지의 관례까지도 깬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초등학교 졸업식 때 기꺼이 학부모 대표 답사를 하시면서 큰딸을 자랑스러워하셨던 아버지는 이후에도 늘 자식들에 대해서는 오버(?)하는 후원자였다. 늘 절대 지지로 앞서 나가시는 바람에 우리 오남매는 아버지에게 공개할 내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수위를 조절하곤 했다.동네 노인정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심취하신 취미는 단소와 장구 연주, 한국무용이다. 가까운 국립국악원에서 단소를 처음 배우신 이후 대금과 피리까지 영역을 넓히신 아버지는 판소리, 정악, 아악 등 국악원의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면서 마니아가 되셨다. 아버지의 음악은 수년간 ‘전설 따라 삼천리’를 떠올리게 하는 처연한 소리로만 여겨져 우리 형제들에겐 무조건 기피 대상이었다. 한도 끝도 없이 우리 음악의 중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셨던 아버지는 급기야 학생용 단소 책자를 손수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했다. 조카들은 단소를 의무적으로 배워야 했고, 온가족이 모인 여름 휴가지에서도 단소 경연대회가 어김없이 열렸다. 아들 딸 사위를 심사위원으로 임명, 손수 준비한 채점표까지 돌리고 종합 심사 평가에 이어 상품까지 하사하신 후에는 꼭 본인의 연주를 들려주시곤 했다. 평생 고스톱을 치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명절이면 우리들의 어떤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당신이 준비한 이런 학습 이벤트로 원성을 사곤 하셨다.이제 딸 넷과 아들을 제 몫 하는 사회인으로 키워내고 할아버지가 되신 아버지는 요즘도 가까이 사는 손자들의 초등학교를 방문하시곤 한다. 두루마기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과일 주스 몇 병을 사들고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찾아오는 아버지는 담임선생님들 사이에서 유명인사다.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다 보니 지나치게 오버하는 것으로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행동들이 요즘 ‘알파걸’들의 아버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딸이 많아서였을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무척 좋아하셨지만 딸이기에 차별받았던 기억은 없다. 생각해 보니 남성에 대해 애인, 보호자, 남편보다는 동료, 친구, 선배로서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가졌던 이유도 아버지에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요즘 알파걸들의 아버지는 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딸들에게 남자들이 했던 업무와 직업을 권하고 남성적인 방식과 남성의 세계를 딸들에게 전달, 이해시킨다고 한다.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에서 자란 알파걸은 자연스레 아버지를 통해 남성의 영역까지 자신의 이상적인 롤(Role)모델로 받아들인다고 한다.‘알파걸’들이 정확히 어떤 딸들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알파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기사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는 당신 세대식의 알파걸을 키운 아버지였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럽고 고맙다. 이번 주말에는 근래 들어 단소 악보집 편집에 심혈을 기울이시느라 두문불출하고 있는 아버지와 오랜만에 봄맞이 산행이라도 다녀와야겠다.1962년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에서 홍보를 전공했다. 잡지 및 신문사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에너지관리공단 홍보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