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전자업계의 ‘선택과 집중’

일본의 미쓰비시전기는 휴대전화의 개발·생산에서 완전 철수하기로 했다고 지난 3일 발표했다. 휴대전화 계약자 수가 1억 건을 돌파하는 등 일본 내 휴대전화 시장이 포화상태에 도달해 채산성이 악화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미쓰비시는 휴대전화 매출이 연간 1000억 엔을 넘지만 수년간 적자를 냈었다.세계 5위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제조업체인 일본의 파이오니어사는 올해 안에 PDP 생산을 중단하고 TV 조립 사업에만 집중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파이오니어는 PDP를 직접 생산하는 대신 세계 최대 PDP 제조업체 마쓰시타전기로부터 50인치 이상 대형 PDP 패널을 공급받을 계획이다.일본의 전기·전자 업체들이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업에선 잇따라 과감히 손을 떼고 있다. 자신 있는 부문에만 올인(다걸기)하는 ‘선택과 집중’을 위해서다. 채산성이 없거나 시너지 효과가 적은 사업은 버리고 유망한 분야만을 골라 집중 투자하겠다는 얘기다.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연구개발(R&D)과 설비 투자 등의 비용 절감이 필요하지만 다양한 사업에 한정된 경영 자원을 분산할 경우 수익성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일본 전기·전자 업체의 선택과 집중은 지난해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산요전기는 작년 말 휴대전화와 통신 관련 사업에서 전면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휴대전화 사업을 교세라에 매각하기로 했다. 히타치도 PC 생산에서 전면 철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히타치는 이미 업무용 PC 생산을 미국 휴렛패커드(HP)에 위탁한데 이어 가정용 PC 생산과 신기술 개발도 중단하기로 했다. 정보기술(IT) 기기 분야의 과당경쟁에 따른 경쟁력 저하로 채산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일본을 대표하는 전자 업체인 소니는 게임기용 고성능 반도체의 제조 설비를 도시바에 매각하기로 했다. 소니는 매각으로 얻는 약 1000억 엔의 자금을 유기 EL(전계발광소자) TV의 양산과 화상 센서의 생산 능력을 확충하는 데 집중 투입할 계획이다. 소니는 또 샤프와 10세대 LCD(액정표시장치)패널을 공동 생산하기로 최근 합의했다.도시바는 소니와 차세대 DVD(디지털비디오디스크) 표준 경쟁에서 뒤진 HD-DVD 분야에서 철수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도시바는 주력인 반도체와 원자력 발전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도쿄 긴자의 옛 본사 건물과 영상·음악 관련 자회사도 처분할 예정이다. 대신 반도체 분야에는 2009년까지 그룹 총 설비 투자액의 58%에 해당하는 약 1조 엔을 쏟아 부을 방침이다.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꺾는다는 게 목표다.PDP 사업에서 손을 떼거나 축소하는 전자 업체들도 잇따라 나타나고 있다. 후지쓰는 경쟁 심화와 가격 하락으로 인해 이달부터 PDP TV 생산을 중단했다. 후지쓰는 “지난 몇 년 동안 PDP TV 사업의 수익성은 계속 악화됐다”며 “이 같은 시장 상황이 장래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사업 철수 배경을 설명했다.PDP TV만을 생산해 온 파이오니어 역시 지난해 9월 일본 최대 LCD 패널 업체인 샤프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올여름 LCD TV 생산을 추진 중이다. 파이오니어는 최근까지 가고시마 야마나시 시즈오카 등에서 42인치 50인치 60인치의 대형 PDP 패널만을 만들어 왔다. 가고시마 공장은 이르면 올해 문을 닫고, 야마나시와 시즈오카 공장은 PDP TV 조립 공장으로 전환된다.작년 5월에는 일본 중견 가전 업체 후나이전자가 PDP 사업을 중단했다. 이에 따라 일본 기업으로는 마쓰시타와 세계 4위 히타치만 PDP 패널을 생산하게 된다.◇= 일본 전기·전자 업계의 구조조정은 한계 사업 철수에만 그치지 않는다. 경쟁력 있는 사업만 남긴 뒤에도 관련 업체 간 합종연횡을 통해 경쟁력을 더욱 키우고 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전기·전자 업체 간 자본 제휴와 공동 생산 합의 등이 그것이다.마쓰시타전기 캐논 히타치제작소 등 3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작년 12월 25일 도쿄 시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LCD 사업에 포괄 제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마쓰시타가 히타치의 대형 LCD 자회사를, 캐논이 히타치의 중소형 LCD 자회사를 단계적으로 산하에 거둬들인다는 것이 핵심이다.특히 마쓰시타는 이번 제휴를 통해 샤프가 오사카 인근에 건설 중인 사카이 공장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대형 LCD공장을 지어 2009년부터 가동하기로 했다. 마쓰시타가 3000억 엔을 투자해 건설할 이 공장은 PDP 생산에 주력해 온 마쓰시타로서는 이례적인 대규모 투자다. 이로써 ‘PDP는 마쓰시타, LCD는 샤프’라는 전자 업계의 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마쓰시타-캐논-히타치’ 연합이 출범하기 나흘 전인 지난해 12월 21일엔 가타야마 미키오 샤프 사장과 니시다 아쓰토시 도시바 사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LCD TV 사업에서 손잡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내년부터 샤프는 32인치 이상 중대형 패널을, 도시바는 TV 화상 처리용 반도체를 공급하기로 했다.도시바가 샤프와 손을 잡은 데 대해 업계에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도시바는 원래 마쓰시타 히타치와 2005년 IPS알파테크놀로지라는 대형 LCD 제조 자회사를 공동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다. 또 캐논과는 차세대 패널인 표면전계디스플레이(SED)를 공동 개발 중이다.과거 사고방식이라면 도시바는 샤프가 아니라 ‘마쓰시타-캐논-히타치’연합에 합류했어야 했다. 그러나 도시바는 경쟁 업체인 샤프와 제휴했다. 도시바와 샤프의 제휴는 두 회사 모두 ‘변신의 귀재’라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실제 지난해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해 세계를 놀라게 한 도시바는 낸드플래시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삼성을 추월하겠다고 공언하며 빠른 변신을 꾀하고 있다. 샤프는 일본 대기업으로는 파격적으로 40대를 CEO로 발탁한 이후 과감한 투자 계획을 잇달아 쏟아내 왔다.◇= 일본 전기·전자 업체들의 과감한 ‘가지치기’나 합종연횡은 비교 우위 사업에 주력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해석된다. 예컨대 도시바는 샤프와의 제휴를 계기로 당분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개발 등에서는 손을 떼고 주력 사업인 반도체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사업에 경영 자원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히타치는 제휴 파트너인 마쓰시타와 캐논에 LCD 주도권을 넘김으로써 LCD 사업의 적자 부담을 덜어내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히타치는 TV와 함께 양대 적자 사업으로 꼽히는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자회사도 외국 자본에 매각하기로 했다.또 제품의 디지털화에 따른 불가피한 전략이란 지적도 있다. 가전 제품이 디지털화하면서 아날로그 시대에 비해 R&D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인수·합병(M&A)을 통해 대형화된 유통 업체들이 강화된 협상력을 무기로 가격 인하 압력을 넣고 있는 것도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그같은 구조조정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차세대 DVD 경쟁에서 소니에 밀려 HD-DVD 사업을 포기한 도시바에 오히려 찬사가 쏟아지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미즈호증권의 하리야 고이치 애널리스트는 “도시바의 이번 결정은 신속하고 용기 있는 철수”라고 평가했다.도시바가 DVD 사업에서 철수함에 따라 수백억 엔의 손실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바의 HD-DVD 철수가 보도된 다음날인 2월 18일 도쿄 증시에서 도시바 주가는 전날보다 오히려 5.75% 뛰었다. ‘선택과 집중’에 따른 향후 전망을 밝게 본 것이다.실제 일본 전기·전자 업계의 선택과 집중 경영은 각사의 수익성 향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도시바는 2007 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 연결 영업이익이 전년도에 비해 12% 증가한 2900억 엔에 달할 전망이다. 당초 예상보다 300억 엔 많은 것이다. 사상 최고 이익을 냈던 1990년의 3150억 엔에 근접하는 실적이기도 하다.미쓰비시전기도 당초 예상을 크게 웃도는 2300억 엔 정도의 영업이익이 예상된다. 반도체와 디지털 가전 등의 사업을 축소해 가격 하락의 영향을 최소화한 데다 동유럽을 포함한 신흥시장의 개척에 나선 것이 이익 향상에 기여한 덕분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