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화된 인플레와의 전쟁
지난 5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 옆에 있는 인민대회당(국회의사당 격). 세계는 올해 중국 정부의 업무 보고를 카랑카랑 읽어 내려가는 원자바오 총리의 입을 지켜봤다. 미국과 함께 세계 경제 성장의 양대 축으로 부상한 중국의 올해 국정 방향이 윤곽을 나타내는 순간이었다.이날 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 1차 전체회의 개막식에서 원 총리는 올해 경제 운용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인플레와 경기 과열 방지 2가지를 꼽았다. 원 총리는 곳곳에서 인플레 억제를 강조했다. 심지어 물가의 과도한 상승을 막기 위한 9가지 대책까지 나열했다. 예전의 업무 보고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물가 상승이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빈부 격차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배어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물가 대책에 저소득층에 대한 보조 정책을 넣음으로써 이 같은 우려를 보여줬다.원 총리가 제시한 올해 물가 억제 목표는 4.8%다. 지난해 물가 상승률과 같지만 이는 1996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원 총리가 작년 업무 보고 때 제시한 물가 상승률 억제 목표치인 3%보다 1.8%포인트 높은 것이다. 어느 정도의 물가 상승을 용인해야 할 만큼 인플레 압박이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지적이다.문제는 중국이 올인하는 물가 안정 대책이 세계 곡물 시장의 불안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원 총리는 물가 대책의 하나로 “공업용 양곡은 물론 식량 수출을 엄격히 통제하겠다”고 밝혔다. 원 총리가 식량 수출입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같은 날 천시원 중앙농촌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은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중국은 곡물 수출을 원칙적으로 전면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천 주임은 “곡물 수출 전면 중단 시 곡물 가격이 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곡물 시장이 중국발 나비 효과에 또 다시 긴장하게 된 것이다.세계 7위 식량 수출국인 중국은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곡물 수출을 억제하면서 세계 곡물 가격 급등을 야기해 왔다. 올해부터 1년 한시 조건으로 밀 쌀 옥수수 등 57개 곡물에 대해 5~25%의 수출 관세를 부과하고 있고 앞서 작년 10월엔 84개 곡물류에 대한 증치세(부가가치세) 환급 제도를 폐지했다.중국 정부는 종전까지 농산물을 수출할 경우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가공·판매 과정에서 징수한 증치세를 환급해 주는 제도를 실시해 왔다.중국이 이처럼 곡물 수출 억제에 매달리는 이유는 수출이 늘면서 자국 내 농산물 수급 균형이 깨졌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 곡물 총생산량은 5억150만 톤으로 전년보다 0.7% 증가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곡물 수출량은 전년 대비 62.5% 증가한 991만 톤에 달했다. 지난해 중국의 밀 수출량은 한국의 연간 밀 생산량의 511배인 307만 톤으로, 전년보다 104.0% 증가했다.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1년으로 돼 있는 수출 관세 부과 기간을 연장하거나 관세율을 높이는 등의 강력한 수출 억제책을 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 총리는 부족한 소비재를 충당하기 위해 비축 시스템을 서둘러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대대적인 곡물 수입이 예고된다는 점에서 중국이 곡물 시장의 블랙홀로까지 떠오를지 주목된다.원 총리가 제시한 올해 경제성장률은 8%다. 작년에 기록한 11.4%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지만 작년의 업무 보고 때 제시한 수치와 같다는 점에서 중국 전문가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물론 원 총리는 비교적 빠른 성장이 과열로 바뀌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기조는 작년 업무 보고 때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달라진 건 오히려 유연성 있게 긴축 정책을 펴겠다는 발언이다. “거시 조정의 템포와 강도를 정확히 조절하겠다”는 게 그것이다. 지난 1월 말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당 고위간부를 상대로 한 단체 학습에 처음 등장한 이 발언은 이후 저우샤오촨 인민은행 총재가 언급한 데 이어 이번에 원 총리의 정부 업무 보고에 들어감으로써 중국 긴축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갈 것임을 예고했다. 원 총리는 “현재 국내외 경제에 불확정 요인이 비교적 많다”며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문제를 면밀히 분석해 시기와 형세를 잘 살펴서 적절한 시기에 유연하게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원 총리는 예전과 달리 국제 경제의 환경 변화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만큼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원 총리는 세계 경제 성장 속도의 둔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미국 달러 약세, 국제 금융시장 위험 증대, 국제 곡물 및 원자재 가격 급등, 무역 보호주의 강화 등이 중국 경제 발전에 불리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원 총리의 유연한 긴축 발언은 과거 정부 업무 보고 때도 억제할 것은 억제하지만 키울 것은 키운다며 천편일률적인 긴축은 하지 않겠다고 해 온 것과 맥이 통한다. 하지만 이번 발언은 유연성을 더욱 확대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 긴축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원 총리가 유동성 환수를 위해 공개시장 조작과 은행 지급준비율 인상 카드를 쓰겠다면서도 긴축 효과가 큰 금리 인상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금리의 조정이 합리적 성과를 발휘하도록 하겠다”고 말한 게 그것이다. 당장 긴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지만 만의 하나 지나친 긴축으로 인한 경기가 경착륙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경기 과열도 걱정이지만 경기 급랭을 더 걱정한다.원 총리의 정부 업무 보고에선 중국의 긴축보다는 중국 내 노동자의 권익 보호 강화가 오히려 한국 기업들의 리스크로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줬다는 지적이다. 올해 1월부터 실시된 노동계약법을 놓고 ‘완화해야 한다’와 ‘강행해야 한다’는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시점에서 원 총리는 강행 쪽에 손을 들어줬다.최근 중국 최대 제지 업체인 주룽제지의 정인 회장은 “노동계약법 시행 이후 기업들의 비용과 리스크가 커져 베트남과 인도 등으로 이전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정치자문기구) 위원이기도 한 그는 “노동계약법 때문에 외국 기업과 민영 기업들이 문을 닫으면서 오히려 중국 취업률을 떨어뜨리고 있다”며 “종신 고용 조항을 3∼5년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현행 노동계약법에선 10년 장기 근속자나 3회 연속 근로 계약을 체결하는 노동자에 대해선 종신 고용을 통해 정년을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반면 노동계약법은 개혁 개방 30년간 지속돼 온 ‘강한 자본과 약한 노동’의 불공평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며 엄격히 시행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협 위원인 치우리청 난카이대 경제학원 부원장은 “노동자의 권익 보호는 경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윤리 문제이기도 하다”며 “기업이 노동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임금을 낮춰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오래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전인대 법률공작위원회의 장스청 부주임도 “노동계약법 실시로 인건비가 크게 상승한 기업은 불법 기업들 뿐”이라고 말했다. 장 부주임은 “저부가가치 기업이 문을 닫고 철수하는 고통의 과정을 감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