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전남 장성이다. 장성이란 이름은 험준한 산맥, 즉 노령산맥이 마치 긴 성의 모습과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나는 힘들거나 외로울 때면 잠시 일손을 놓고,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고향의 풍경을 생각하며 추억에 빠져든다.눈을 감으면 난 어느새 고향마을 앞에 서 있다. 풀 향기 나는 바람을 타고 코스모스 피어 있는 마을길을 지나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열 지어 서 있는 신작로에 다다른 나는 어느새 코흘리개 소년으로 돌아간다. 까만 고무신을 신은 나는 지게를 메고 논으로 일 나가시는 아버지 손을 잡고 폴짝폴짝 걸어간다. 논두렁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 장수하늘소와 메뚜기를 친구삼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여름 한나절 매미 울음소리에 졸음이 올라치면 아버지는 일손을 멈추고 내 얼굴을 어루만져 준다. 농사에 거칠어진 손이지만 내 입가엔 미소가 어린다. 아버진 노래를 부른다. 서편제 소리 같기도 하고, 자장가 같기도 하다.누나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누나가 목 놓아 울고 있다. 집에는 마을 사람이 모두 와 있는 듯 몹시 시끄럽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아버지 얼굴 한 번 보렴”이라고 하신다. 병풍 뒤로 하얀 천으로 덮인 것이 보인다. 직감적으로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매를 맞은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어머니 눈물 때문에 더욱 더 슬피 운다. 그때 난 고작 아홉 살이었다.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나에게 작은 추억만 남겨 놓고 떠나신 것이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고통은 우리 가족의 몫이었다.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9남매를 먹이고 입히기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셨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방 한구석에서 얼마나 아파했는지 모른다.지금 생각해 보면 배고픔보다 나를 더 슬프게 한 것은 아버지의 빈자리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한번쯤 기대기도 하고 투정도 부릴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때로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때는 먼저 가신 아버지가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온 나는 악착같이 일을 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없어서,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더 다독였는지도 모른다.더 이상 배고프지 않지만, 아버지에 대한 향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아버지는 산소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존재하시되 잡히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내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 내게 영향을 미치고 계셨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따지고 보면 그리움이었던 것이다.그리고 난 나의 자식들을 생각한다. 내 자식들과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같이했나. 그리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나.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시킨다는 미명 하에 초등생 어린 자식 둘과 아내를 캐나다에 보내고 너무 어린 막내는 직접 데리고 살고 있다.항상 아버지가 그립듯이 나에겐 내 자식도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최근 새로운 결단을 내렸다. 오는 8월, 아이들과 아내를 모두 귀국시키고 비로소 완전한 가정을 이루기로 말이다. 그리고 세 아이에게 내 고향 장성의 파란 하늘과 노령산맥의 웅장함을 보여줄 것이다. 되도록 많은 시간을 할애해 아버지와 많은 추억을 갖도록 해주고 싶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노래를 듣고 훗날 추억하도록…. 바람이 화음을 넣고, 나뭇잎이 관객이 되어주는 내 고향의 오케스트라 속에서 나는 내 아이들과 부대끼며 뒹굴 것이다.나의 아버지! 비록 많은 시간을 같이하진 못했지만, 그 때문에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당신으로 인해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1968년 전남 장성 출생. 97년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해 2000년 외식 프랜차이즈 ‘행복추풍령 감자탕&묵은지’를 런칭, 현재 전국 350여개 가맹점을 운영 중이다.김선권·행복추풍령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