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전자업계의 삼성 협공
지난 2월 26일 오후 7시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그랜드프린스호텔 기자회견장. 소니의 주바치 료지 사장과 샤프의 가타야마 미키오 사장이 사이좋게 나란히 입장했다.두 사람은 샤프가 오사카 인근 사카이시에 건설 중인 대형 화면용 제10세대 LCD(액정표시장치) 패널 공장에 소니가 출자하는 방식으로 합작회사를 만든다고 공식 발표했다. 새 회사에 대한 출자 비율은 샤프가 66%, 소니가 34%. 구체적 액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샤프가 당초 발표했던 사카이 공장의 투자액 3800억 엔(3조3000억 원)을 감안하면 소니의 투자액은 1000억 엔(88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그동안 한국의 삼성전자와 합작해 LCD 패널을 생산해 오던 소니가 삼성에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삼성과 소니는 2003년 공동으로 2조 원을 출자해 충청남도 탕정에서 합작회사 ‘S-LCD’를 설립해 제7, 8세대 LCD 패널을 만들어 왔다. 주바치 소니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삼성과의 합작관계는)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으나 앞으로 LCD TV가 지금 같은 속도로 대형화할 경우 소니의 주력 합작사는 자연스럽게 삼성에서 샤프로 교체될 게 뻔하다.삼성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소니는 LCD 패널 사업에 합작 투자했던 삼성전자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소니와의 합작을 통해 삼성은 LCD 패널은 물론 LCD TV 사업에서도 세계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니가 LCD 패널 사업의 경쟁자인 샤프와 손잡기로 했다는 소식의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소니가 샤프와 제휴하기로 결정한 배경 중 하나가 ‘비자금 특검의 여파로 삼성의 경영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으로 알려지면서 삼성의 쇼크는 더 컸다. 특검 수사 이후 우려됐던 해외 합작사 이탈이 구체화됐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와 동종 업계로부터 ‘적군’(敵軍)인 삼성전자와의 관계를 청산하라는 직·간접 압력을 받아 온 소니는 특검을 빌미로 삼성과의 결별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LCD 패널, LCD TV, 반도체 등 분야에서 전방위적인 일본의 ‘타도 삼성’ 공세가 구체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소니와 샤프의 LCD 패널 합작 발표는 당초 전해진 것처럼 LCD TV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소니가 LCD를 삼성 외에도 샤프로부터 구입한다는 ‘구입처 다변화’ 수준을 넘어선 것이어서 업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소니와 샤프의 제휴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 것은 지난 2월 23일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소니, 샤프서 LCD 패널 조달’이란 제목의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렸다. 그동안 삼성전자와의 합작 생산을 통해 LCD TV용 패널을 전량 공급 받아 온 소니가 앞으로 일본의 샤프사로부터도 LCD 패널을 사들인다는 내용이었다.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단순히 LCD 패널 구입처를 하나 더 늘리는 게 아니라 차세대 LCD 패널 생산에 합작 제휴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기존 소니·삼성 합작회사가 8세대 LCD를 생산하는 데 비해 소니·샤프 일본 합작 공장은 화면이 더욱 큰 10세대 LCD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삼성은 위협을 느끼고 있다. 세계 LCD TV시장은 점차 대형 화면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특검에 발목이 잡힌 삼성이 특유의 과감하고 신속한 투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서 우려했던 ‘특검발(發) 경영 충격’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업계에서도 소니의 ‘변심’은 삼성의 경영 차질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지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삼성이 투자 계획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패널 공급이 차질 없이 이뤄지겠느냐는 게 소니의 판단인 것 같다”고 전했다.또 삼성에 대한 견제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현재 TV용 LCD 패널 분야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LCD TV 매출에서도 지난해 처음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2004년까지만 해도 소니의 LCD TV 매출이 삼성보다 70%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S-LCD 합작으로 삼성만 좋은 일 시켰다’는 비판 여론이 일본에서 일어날 만하다.반도체 분야에서도 일본은 삼성의 10년 독주에 밀려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했다. 최근에야 투자를 재개한 아픈 기억이 있다.소니가 샤프로부터도 패널을 구매하게 되면 세계 LCD 패널 시장의 판도는 급격히 변한다. 현재 세계 LCD 패널 시장의 절대 강자는 단연 한국 기업이다. 지난해 연간 기준 점유율을 보면 삼성전자가 25.7%, LG필립스LCD가 22.1%로 전체 시장의 47%를 차지했다.반면 일본 업체 중에서는 샤프가 12.4%의 점유율로 유일하게 5위에 올라 있을 뿐이다.한국 LCD 패널 기업의 경쟁력은 세계 주요 LCD TV 업체와 제휴에서 나온다. 국내 패널 제조사들은 2004년부터 주요 TV 제조업체에 LCD 패널을 독점 공급해 패널 시장 주도권을 높였다. 또 LCD TV 사업의 경쟁력도 높일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자사 LCD TV 사업부는 물론 일본 소니를 ‘동반자’로 끌어 들였다. LG필립스LCD는 그룹 내 계열사인 LG전자와 네덜란드 필립스를 ‘우군’으로 삼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하지만 소니가 샤프와 제휴함에 따라 이런 구도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특히 소니가 샤프와 차세대 제품인 10세대 패널을 공동 생산하기로 한 만큼 내년 이후 ‘소니-샤프 연합군’이 한국의 LCD 패널과 LCD TV 업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LCD 분야의 원천 기술을 갖고도 한국과 대만 업체들에 세계 1~4위를 내준 일본은 최근 샤프와 마쓰시타를 축으로 ‘LCD 부활’을 준비 중이다. 일본 내 LCD 패널 생산량 1위인 샤프만 하더라도 40인치 이상 TV용 패널 출하량을 놓고 보면 삼성전자의 3분의 1에 불과할 정도다. 세계 최초로 10세대 라인을 짓고 있는 샤프는 도시바에 이어 소니까지 바이어로 확보하면 TV용 패널 분야에서 단숨에 강자로 올라설 전망이다.업계 관계자는 “일본 전자 업계의 연합전선이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소니와 샤프가 10세대 LCD TV 사업에서 손을 잡게 되면 LCD TV 시장 세계 1위인 삼성전자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것”이라며 “그동안 삼성전자와 LG전자가 LCD 패널 시장의 주도권을 쥐면서 TV 표준화 경쟁에서 앞서 갔지만 앞으로는 일본 업체들에 주도권을 넘겨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삼성에 대한 일본 기업들의 압박은 협공 양상을 띠고 있다. 일본 도시바가 ‘타도 삼성’을 위해 내년까지 1조8000억 엔을 들여 낸드플래시 공장 2곳을 신설하고 PDP 패널 세계 1위인 일본 마쓰시타가 3000억 엔을 들여 8세대 액정 패널 공장을 짓는 등 최근 일본 기업들의 공세가 극에 달하고 있다.실제 PDP 세계 1위 마쓰시타는 액정 패널을 자체 생산한다는 방향을 정하고 히타치 캐논 등과 협력을 다지고 있다. 당초 마쓰시타는 필립스가 매각하려던 LG필립스LCD 지분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국 ‘일본 내 생산’으로 가닥을 잡았다. PDP 시장 지배력에 액정 패널까지 더하면 마쓰시타는 삼성전자와 삼성SDI(PDP 패널)를 위협하는 종합 디스플레이 기업으로 부상할 전망이다.일본 내에서 삼성과 손잡은 소니를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 않았던 것도 반(反)삼성 분위기를 반영한다. 2003년 소니가 삼성과 제휴를 할 당시 일본 정부는 경쟁국 업체인 삼성전자와 액정 패널 합작에 나선 소니를 강력하게 말리고 나섰다.일본의 20개 전자업체는 2004년 일본 정부 후원 아래 추진하던 차세대 LCD 개발 컨소시엄에서 소니를 배제했다. 사실상 소니를 ‘왕따’시킨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소니는 지난해부터 삼성과 8세대(2단계) 투자를 공동으로 진행할지 아니면 자국 업체와 제휴할지 여부를 고민해 왔다.결국 이런 상황에서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는 소니에 자국 업체와 제휴를 맺는 ‘좋은 명분’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소니가 특검으로 인한 삼성의 경영 차질을 이유로 샤프와 제휴해 LCD 공급처를 다변화하는 한편 자국 업체들의 비난을 피하는 기회로 삼은 것 같다”고 말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