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진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미국 경제가 그렇다. 경기 침체(recession)가 확연해지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압력마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경기 침체 속에 물가만 뛰는 지난 1970년대식의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도래할 것이란 공포감이 스멀스멀 솟아오르고 있다. 경기 침체를 뜻하는 ‘R의 공포’에 이어 스태그플레이션을 의미하는 ‘S의 공포’도 염두에 둬야 할 상황이다.물론 그렇다고 비관만 할 상황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보면 경기 침체를 앞두고 물가는 으레 뜀박질했었다. 물가상승률이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난 1970년대처럼 두 자리 숫자는 아직 아니다. 더욱이 ‘모노라인’으로 불리는 채권 보증 업체 문제가 해결 기미를 보이면서 신용 위기 심화에 대한 우려감은 해소되는 분위기다. 다른 무엇보다 증시 주변에 대기 자금이 모이고 있어 웬만한 악재에도 추가 하락은 방지되는 모습이다.따라서 좀 더 멀리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순간순간의 지표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을 꿰뚫는 지혜가 필요하다. 스태그플레이션에 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능성은 가능성에 그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얘기다.피자와 베이글은 미국인들의 주식이다. 우리식으로 하면 밥이다. 최근 피자와 베이글 값이 많이 올랐다. 한 조각에 5~6달러 하던 피자는 7~8달러를 받는다. 베이글이나 식빵도 마찬가지. 최근 1년 동안 평균 25% 올랐다는 통계도 있다.원인은 국제 곡물가 상승이다. 빵의 원료가 되는 밀 값이 폭등세다. 지난 2월 26일 현재 미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5월 인도분 밀 가격은 부셸당 12.145달러를 기록했다. 사상 최고치다. 하루 전날인 25일 미니애폴리스 곡물거래소에서는 3월 인도분 북미산 봄밀 가격이 전날보다 22%나 오르기도 했다. 밀 값은 최근 1년간 배 이상 올랐다.밀만이 아니다. 옥수수와 콩 등 대부분 곡물 값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콩 값은 최근 1년간 91%나 올랐고 옥수수는 최근 3개월간 40% 상승했다. 설탕 값도 지난 1년간 36% 뛰었다. 이렇듯 주요 식품의 원재료 값이 뛰니 빵 값이 오르지 않고는 못 배긴다.그래서 나온 말이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다. 애그플레이션은 농업을 의미하는 애그리컬처(agriculture)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 농산물 가격 상승에 따른 물가 상승을 의미한다. 국제 곡물 값 상승 속도가 워낙 빨라 애그플레이션은 현실화될 공산이 크다.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상승을 뜻하는 ‘오일플레이션(oilflation)’도 다시 기세등등하다. 지난 2월 26일 현재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88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말로만 얘기되던 ‘유가 100달러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유가와 곡물가 상승은 미국 물가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지난 1월 중 생산자 물가는 전달에 비해 1.0% 뛰었다. 에너지 값이 1.5% 오르고 식품 값이 1.7% 오른 영향이 컸다. 전년 동기와 비교해서는 7.4% 상승해 1981년 이후 27년 만에 가장 큰 폭의 상승률을 보였다. 지난 1월 중 소비자물가도 전달에 비해 0.4% 상승했다. 역시 식품 가격이 0.7% 올라 소비자물가 상승을 주도했다. 에너지와 곡물가 상승은 다른 상품의 원가 상승을 부채질해 에너지와 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 및 생산자물가 상승률도 예상치를 넘었다.경기 침체가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물가마저 뜀박질을 보이고 있는 양상이니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감이 나올 만도 하다.스태그플레이션은 경제성장률이 정체되는 상황에서 물가만 뛰는 현상을 가리킨다. 지난 1970년대 세계를 덮치면서 일반화된 용어다. 지난 1973년 말 중동 전쟁으로 인한 1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그해 10월부터 넉 달간 원유 가격이 네 배 이상 뛰었다. 각종 통화정책도 별무소득이었고 세계 각국은 불황과 물가 상승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교수는 20세기 들어 처음 맞는 이 같은 경제 현상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공식 선언했다.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해결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경기 침체는 물가 하락과 짝을 이뤄 나타난다. 경기가 나빠지면(디플레이션) 사람들이 소비 지출을 줄인다. 이로 인해 물건 값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반대로 경기가 호황이면 소비를 늘리기 때문에 물가는 상승(인플레이션)한다는 게 경제학의 고전적인 이론이다.이 방식대로 나타날 경우 처방은 분명하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기준금리를 올리면 된다. 아니면 재정 지출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반대로 디플레이션이 우려되면 금리를 내리거나 정부 지출을 늘린다. 이걸 하라고 중앙은행이 존재한다.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면 중앙은행은 딜레마에 빠진다. 경기를 살리자면 금리를 내려야 한다. 물가를 잡자면 금리를 올려야 한다. 경기도 잡고 물가도 잡으려면 묘책이 없다. 동시에 해결할 방도가 없다. 성급하면 ‘샤워실의 바보’가 될 수도 있다. 더운물과 찬물을 제대로 맞추기 위해선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 이를 참지 못하고 더운물과 찬물을 교대로 틀어서 엉망으로 만드는 게 샤워실의 바보다. ‘스파게티 볼 효과(Spaghetti bowl effect)’도 우려된다. 접시에 담긴 스파게티처럼 정책이 얽히고설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스태그플레이션은 다른 어느 것보다 무서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이러다 보니 가장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한 것이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다. 상황을 잘못 판단하면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만 더욱 키울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이 불거진 이후 FRB는 금리 인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작년 9월부터 지난 1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연 5.25%에서 3.0%로 2.25%포인트나 떨어뜨렸을 정도다.벤 버냉키 FRB 의장 등 FRB 간부들은 이후에도 틈만 나면 상반기 경기 하강 위험을 경고하면서 추가 금리 인하 방침을 시사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강화됐지만 인플레이션보다는 경기 둔화가 더 우려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아직은 금리 인하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는 3월 18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상태다.그렇지만 스태그플레이션 공포가 엄습하는 상황에서 마냥 금리 인하 정책을 고수하기는 버거울 수밖에 없다. FRB 간부들이 경기 하강 위험이 줄었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 방지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고민의 표현이다. 경제 전문 사이트인 마켓워치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어윈 켈너는 “최근의 인플레이션 압력은 FRB로 하여금 선택의 폭을 좁게 하고 있다”며 “FRB가 곧 금리 인하의 끝에 다다랐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그렇다고 너무 공포에 빠질 필요는 없다. 공포는 어디까지나 공포이고,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실제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는 얘기다. 데이비드 켈리 JP모건 투자전략가는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압력은 경기 침체가 시작되는 시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라며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해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앨리스 리블린 전 FRB 부의장도 “지난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때는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했으며 실업률도 8%대까지 달했다”며 “지금 상황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이런 지적이 옳을지, 그를지는 아직 모른다. 경기 침체나 스태그플레이션은 지나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뉴욕 증시가 상당한 하방경직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여기에 갈수록 심화되던 신용 경색도 ‘일단 멈춤’할 계기를 잡았다.하영춘·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