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DVD 경쟁
‘HD DVD냐! 블루레이 디스크냐!’ 지난 몇 년간 끝없는 논쟁을 불러왔던 차세대 DVD 포맷이 도시바가 HD DVD 사업 철수를 전격 선언하면서 블루레이 디스크 승리로 가닥이 잡혔다.지난 1월 CES 2008 전시회에서 HD DVD 진영은 대형 부스를 만들어 블루레이 디스크와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2월 초 HD DVD 진영을 이끌었던 도시바가 사업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루머가 증권가에 흘러나오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업계에서는 수년간 HD DVD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한 도시바가 쉽게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그러나 주요 언론들은 도시바가 HD DVD 사업을 접을 것을 기정사실화한 기사들을 지난 2월 16일부터 쏟아놓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도시바는 HD DVD 사업 철수가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며 즉각 반론을 내놨지만 결국 HD DVD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공식 발표했다. 수년간 벌여 왔던 차세대 DVD 표준 경쟁 철수 절차는 너무나도 신속히 진행됐다.이번 도시바 HD DVD 철수에 따라 차세대 DVD 포맷은 소니가 이끄는 블루레이 디스크 진영이 탄력을 받게 됐다. 또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DVD에서 차세대 DVD로의 전환이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도시바가 HD DVD 사업을 접은 결정적인 이유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VHS, DVD 등 미디어 표준 사업은 먼저 지속적인 운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자금이 중요하다. 하지만 기술과 자금보다 중요한 것은 표준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확보해야 했다. 처음부터 도시바는 약세로 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등 IT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업체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인 반면 나머지 IT 업체 및 가전 업체들은 블루레이 디스크 뒤에 줄을 섰다. 삼성전자 LG전자 히타치 필립스 델 애플 등 업체들이 블루레이 디스크 진영을 지지했다.HD DVD 진영은 파라마운트, 유니버설 등 영화사를 포함해 135개 업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블루레이 진영에는 소니픽처스, 월트디즈니, 21세기폭스 등 영화사를 포함해 총 178개 업체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표준 경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인 콘텐츠 업체들은 HD DVD에 힘을 실어줬다.HD DVD 사업은 지난해부터 곳곳에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요 영화사와 가전 업체들이 HD DVD 이탈 조짐을 보이자 도시바는 미국 최대 성수기인 연말 시즌에 HD DVD 플레이어 가격을 200달러 이하로 내렸다. HD DVD 타이틀 3장을 포함한 가격이었으니 사실상 소비자는 100달러에 HD DVD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가격 파괴라는 마지막 카드를 쓴 것이다.하지만 시장은 냉혹했다. HD DVD 지원군이었던 워너브러더스가 올해 1월 블루레이 디스크만으로 영화를 출시하기로 했으며, 미국 최대 비디오 대여점인 넷플릭스(Netflix)도 HD DVD 타이틀 취급을 중단했다. 여기에 베스트바이, 월마트도 블루레이 디스크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등 HD DVD 진영에서 탈영병들이 연이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워너브러더스가 블루레이 디스크로 돌아선 것은 도시바에 치명적이었다.이에 따라 도시바는 2월 19일 HD DVD 플레이어와 레코더 생산을 즉각 중단하고 제품 판매도 3월을 끝으로 그만둔다고 공식 발표했다. 도시바는 향후 HD DVD 애프터서비스만을 진행할 계획이다.처음부터 HD DVD는 기술력에서도 블루레이 디스크보다 열세였다. HD DVD는 DVD의 약 3배 용량인 15GB를 저장할 수 있지만 블루레이 디스크는 25GB가 가능하다.저장 매체를 두 장 사용하는 복층 구조에서는 HD DVD가 30GB, 블루레이 디스크가 50GB로 용량 차이가 더 커진다. HD DVD는 3장의 미디어를 사용해 45GB까지 확장할 수 있지만 블루레이 디스크는 최대 4장 200GB 용량 저장이 가능하다.물론 HD DVD는 기존 DVD 제조 공법에서 큰 변화 없이 제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소비자들은 DVD 화질에 비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HD DVD보다 블루레이 디스크에 관심을 보였다.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해 가전 업체들은 그동안 HD DVD와 블루레이 디스크 양쪽 모두에 균형을 맞춰왔다. 지지부진한 표준 경쟁에 지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두 방식을 모두 지원하는 듀얼플레이어를 내놓는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방식을 지원하는 플레이어에 비해 당연히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도시바 HD DVD 사업 철수로 가전 업체들은 블루레이 디스크 시장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됐다. 광학드라이브를 만드는 국내 업체 도시바스토리지테크놀로지코리아(TSST)와 히타치엘지데이터스토리지(HLDS)도 블루레이 디스크 제품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차세대 DVD 표준 혼란 때문에 플레이어와 레코더 구입을 미뤘던 소비자들도 제품 구입에 고민이 사라져 새로운 수요를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도시바 사업 철수의 가장 큰 수혜자는 소니다. 블루레이 디스크 진영에 영화 배급사와 IT 업체들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기술적, 재정적 지원을 했으며 플레이스테이션3 보급을 위해 큰 손해를 안았다.블루레이 디스크 플레이어 기능을 갖춘 콘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3은 원가 이하에 공급돼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대(2008년 1월 기준)가 판매됐다. 플레이스테이션3 생산 원가는 출시 초기 800달러를 웃돌았다. 판매 가격은 사양에 따라 499달러 또는 699달러로 한 대가 팔려나갈 때마다 250달러씩 손해를 봤다.하지만 이런 전략은 블루레이 디스크 인프라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일본의 경우 블루레이 디스크플레이어 점유율은 90% 이상으로 HD DVD 점유율을 압도했다.각 가전 업체들은 일단 향후 시장 상황을 좀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아직 HD DVD를 지지하는 업체들이 남아 있으며 시장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세가 블루레이 디스크 진영으로 넘어간 만큼 향후 출시하는 제품은 블루레이 디스크 제품군 위주로 구성될 것으로 예상된다.돋보기│미디어 표준 경쟁의 역사표준 전쟁은 HD DVD와 블루레이 디스크처럼 상호 호환이 불가능한 기술 간 경쟁을 말한다. 데이터 저장 장치, 녹음 포맷 등이 표준을 두고 2개 또는 그 이상 방식이 경쟁을 벌인다. 가장 유명한 표준 전쟁은 1970년대 시작돼 1980년대 초에 끝난 비디오테이프 경쟁이었다. 소니의 베타 방식과 필립스의 VHS 방식은 결국 VHS가 이기면서 끝났다.1910년대는 움직이는 영상을 저장하는 실린더 레코드와 디스크 레코드 간 경쟁이 있었다. 1877년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에디슨 실린더(Edison cylinder)라는 저장 방식을 내놨지만 1886년 독일의 과학자 에밀 버리너는 디스크 레코드를 발명했다. 업계는 음향 녹음 기술이 조금 더 나은 에디슨 실린더에 업계가 손을 들어준다.1940년대는 음악을 저장하는 방식에서 콜롬비아 레코드가 제시한 30cm(12인치) 크기 LP(Long Play)와 RCA 빅터의 17.5cm(7인치) EP(Extended Play) 간 경쟁이 있었다. 두 방식은 카세트테이프가 등장하기 전인 1960년까지 경쟁이 계속됐으며 LP 방식이 사실상 표준 경쟁에서 승리했다. 아직까지도 오디오 마니아들은 LP를 듣고 있다.이후 1970년대에는 비디오테이프 표준에서 VHS가 시장을 석권했고 CD, 레이저디스크 등을 거쳐 DVD가 그 역할을 맡았다.소니의 디지털오디오테이프(DAT)와 미니디스크(MD), 필립스 디지털콤팩트카세트(DCC) 등은 힘들게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졌다.이형근·디지털타임스 기자 bruprin@gmail.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