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자 사랑의 달팽이 회장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사회 운동가로 맹렬히 활약했던 헬렌 켈러는 “시각 장애는 단지 사물로부터 우리를 격리하지만 청각 장애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격리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듣지 못하면 말하는 법을 배우기가 어렵고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속도도 더디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신생아는 연간 기준으로 약 45만 명 수준이다. 이 중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600여 명이고 난청까지 포함하면 1400명 정도가 소리를 듣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사단법인 ‘사랑의 달팽이’는 청각 장애 아이들이 인공 와우관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하는 기관이다. ‘와우관’이란 달팽이관을 포함한 내이의 기관으로, 청세포에 대한 자극이 청신경을 거쳐 대뇌 피질에 전달되면서 사람이 소리를 느끼게 하는 기능을 한다.사랑의 달팽이는 수술 후 언어 치료와 사회 적응 단계까지를 돌보는 국내 유일한 민간 기관이다. 2000년부터 비영리 단체로 운영되다가 2004년부터 후원회의 골격을 갖추고 지난해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마쳤다. 청각 장애와 인공 와우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사랑의 달팽이 회장은 다름 아닌 탤런트 김민자 씨였다.“옛날에 둘째아이를 낳고 나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던 적이 있어요. 한 1년 동안 귀가 울리는 이명증에 시달리며 귀의 소중함을 느꼈지만 치료받은 후에는 한참을 잊고 지냈었죠.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던 아주대 의료원의 박기현 원장님에게 눈보다 귀가 중요하다, 듣지 못하면 언어 능력을 비롯한 뇌 발달이 늦어져서 사회로부터 소외된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어요.”어린 시절에 수술을 받으면 90% 이상 비장애인과 비슷한 언어생활을 할 수 있는 많은 이들이 수술비가 없고 정보가 부족해서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귀하게 태어난 아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980년대부터 남편인 최불암 씨와 함께한 복지재단과 인연을 맺고 일한 경험이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뜻이 점점 더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인가보다 싶어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남자는 시각의 유혹에 약하고 여자는 속삭임과 같은 청각에 민감하다는 말도 있잖아요. 여성인 저에게 잘 맞는 봉사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인공 와우 수술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 2005년부터 국민건강보험에 지정됐지만 그나마 한쪽 귀에만 적용된다. 또 수술만 하면 끝이 아니라 인공 와우를 활용한 재활 훈련이 필요하다. 사랑의 달팽이 측에서는 전 과정에 1인당 25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설명한다.“인공 와우는 청세포 대신 전극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이에요. 무수한 청세포의 숫자만큼 전극을 심을 수는 없거든요. 수술 후에는 전기음을 사람이 말하는 소리와 주변의 배경음으로 구별해 내는 재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주2회 이상 2년에서 3년이 걸리는 긴 과정입니다.”재활 치료를 거친 아이들에게는 클라리넷을 가르친다. 음색이 풍부한 클라리넷은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았다는 말을 듣는 관악기다. 클라리넷을 배운 아이들은 ‘리사운드 앙상블’의 단원으로 비정기적 연주회를 연다. 단원들의 연주회는 후원자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자리인 동시에 더 많은 후원을 끌어내는 감동의 무대가 된다.사랑의 달팽이에서는 청각 장애아들의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장학 사업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20명의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청력 검사와 무료 보청기 지급 사업도 하고 있다. 더불어 눈에 보이는 사업만큼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인식 전환 사업도 중요하다. 보청기나 인공 와우를 착용한 사람들을 안경이나 렌즈를 낀 것과 마찬가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후원을 호소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서 김민자 회장이 솔선수범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어렵게 마련한 불씨에서 기대만큼 불길이 확 일어나지가 않는다. 짧은 시간에 기부 문화가 정착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수산 시장에서 젓갈 파는 아주머니가 거액을 기부하는 뉴스를 보잖아요. 자기가 고생해 본 사람이 베풀 줄도 아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사는 형편이 나은 분들도 알게 모르게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외국에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기부와 봉사가 활발하다. 최근 들어 부쩍 많아진 연예인 홍보대사 같은 모델도 외국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찾을 수가 있다. 예전의 오드리 헵번이나 요즘의 안젤리나 졸리는 순수하거나 섹시한 용모와 개성 있는 연기에 더해 오지에서 벌였던 봉사 활동으로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다.“사랑받는 인기인으로서 그 사랑을 사회에 돌려주어야겠지요. 사회 환원을 하는 문화가 더 발전해야 우리나라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경제만 앞서간다고 선진국은 아닐 거예요. 오히려 경제보다 기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브라운관에서 배우로서 그녀의 얼굴을 만나기가 어렵다.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 중심으로 살다보니 작품을 드문드문 해서 그랬다. 한 번 촬영에 들어가면 건성으로 할 수가 없어서 작품을 꽤 깐깐하게 고른다고 한다. 아이들을 다 키운 지금에 와서는 젊은 시절보다 작품 선택의 기준이 더 엄격해졌다.“나이가 들수록 더 소중한 일이 뭔지를 자꾸 생각하게 돼요. 쓸데없는 일에까지 에너지를 쏟을 시간이 없으니까요.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가치와 보람이 있는 질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사랑의 달팽이 회장이라는 임무는 그녀에게 가치 있는 일이다. 전혀 소리를 듣지 못하던 어린아이가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인공 와우 수술을 받은 아이가 특수 교육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는 것을 지켜볼 수가 있어서다.“앞으로도 청각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그들의 문화를 함께하며 소리 없는 세상에 사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울림을 주고 싶습니다. 청각 장애인들을 그들만의 세상에 두지 말고 더불어 생활하는 공동체로 맞이해 주세요. 청각 장애인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게 되면 그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우리 모두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술을, 수술이 불가능한 이들에게는 장애로 인한 차별을 겪지 않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울림은 비록 귀로 듣지 못해도 마음으로 전달될 것이다. 88년의 세월 동안 동시대의 누구보다 더 열정적인 인생을 살았던 헬렌 켈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다만 가슴으로 느껴질 뿐이다.”김민자 회장은…1963년 KBS 탤런트 3기 데뷔. 극단 현대예술극장 단원. 1984년 제1회 방송대상 TV연기상 수상. 2002 서울시 홍보대사. 2004년 (사)사랑의 달팽이 회장.김희연 객원기자 foolf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