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 단체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저를 알아보고 ‘김대범이다’라고 소리친 날,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욕을 해도 좋으니 사람들이 나를 한눈에 알아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지난해 상반기까지 큰 인기를 모은 개그 코너 ‘마빡이’에서 ‘대빡이’ 역할로 이름을 널리 알린 개그맨 김대범(29) 씨의 말이다. 키 179cm의 수려한 외모로 ‘고교천왕’ 같이 무게 잡는 역할을 해서인지 개그맨답지 않은 진중함을 풍기지만 의외로 4차원의 정신세계를 가진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끼 많은 개그맨들 사이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기로 소문이 나 있다.“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스스로 재미를 느끼며 살고 싶어요. 독특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개그맨은 제게 직업이 아니에요. 그 자체가 생활이고 나의 삶입니다. 못생기면 못생긴 대로 개그맨에게는 경쟁력이 되고, 개그맨답지 않은 외모는 또 그대로 예상외의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법이죠. 제 단점을 승화해 저만의 무기로 만드는 개그맨이 되고 싶습니다.”그는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린 졸업생이 남기는 한마디에 ‘얘들아, 개그맨이 될 테니까 지켜봐 줘’라고 남겼을 정도로 개그맨에 대한 애착이 어렸을 때부터 강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약속을 지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그에게 최근 개그맨이 아닌 새 직함이 생겼다. 연예인 섭외 대행사 ‘레드펌킨(www.redpumpkin.co.kr)’ 대표가 그것이다.“지난해부터 소속사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개인으로 활동하다 보니 일장일단이 있더라고요. 매니저나 소속사와 수익 배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장점 중 하나예요.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적은 개런티를 받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자신에게 알맞은 기획사를 찾을 때까지 혼자 발 빠르게 다녀보자고 결심한 터에 연예인이 행사 MC로 일해서 받는 출연료의 분배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이벤트 대행사, 기획사, 매니저 등 연예인을 섭외하기까지 과정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연예인과 수요자 사이에 불필요하게 많은 단계를 거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연예인을 직접 섭외해 출연료를 일정 수준으로 낮출 수 있는 레드펌킨을 설립하게 됐죠.”레드펌킨은 결혼식을 주력으로 하고 회사나 각종 모임의 행사 MC를 주선해 주는 회사다. 그의 인맥을 활용한 개그맨들뿐만 아니라 아나운서도 섭외해 준다. 꼭 MC가 아니어도 각종 행사에 필요한 가수, 탤런트 등을 소개해 준다. 섭외 대행 외에도 광고나 공연 기획 서비스도 제공한다. 현재는 그가 아끼는 개그맨 후배들이 출연하는 작은 공연을 준비 중이다.“지난해 7월부터 레드펌킨을 시작했는데, 많은 분들이 벌써 알고 문의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좋은 날 뜻 깊은 자리에 연예인을 초대해 주시는 것인 만큼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짧은 기간에 큰 욕심을 내기보다 지금은 극장에서 같이 고생했던 후배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정도로도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MC 대행사의 대표이자 개그맨으로서 그 자신도 행사를 자주 나가는 편이다. 개그콘서트 아이디어 회의와 리허설, 대학로 공연, 라디오 출연 등으로 꽉 찬 1주일이지만 섭외가 들어오는 틈틈이 다양한 행사의 사회를 본다.그를 위시해 여러 연예인들의 예상 견적과 섭외 가능 여부를 다른 곳보다 빨리 알려 준다는 것도 레드펌킨의 강점이다. 사업가로 첫발을 내디딘 만큼 무리한 확장을 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며 운영할 계획이다.“레드펌킨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호박이라는 뜻입니다. 빨간 호박이라는 단어를 듣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고, 그 상상들만큼 멋진 이벤트를 레드펌킨이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는 개그계의 숨은 노력파다. 데뷔 초기에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라는 말을 듣고 난 후 살을 10kg이나 찌웠다. 현재의 체형은 보충제를 먹고 매일같이 운동을 한 결과다. 또 코미디 연기를 넘어서서 홍콩 영화배우 저우싱츠처럼 남들을 웃고 울리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목표 때문에 200장이 넘는 DVD 타이틀을 소장하고 매일 꼼꼼하게 본다.“반전에서 터지는 웃음을 좋아하는데, 연기할 때도 비슷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일정한 경지에 오르려면 아직 노력이 부족하다고 봐요.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몇 년 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힌다는 이외수 선생님처럼 한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해 몰입하는 시간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자신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는 그가 돈 버는 일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지 궁금하다. 그는 ‘마빡이’ 코너에서 ‘대빡이’ 역할을 맡을 당시 방송을 통해 ‘지하방에서 옥탑방으로 옮겼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옥탑방 석 달 치 월세에 상당하는 금액의 캠코더를 직접 사 삼천 보를 걸으며 마빡이 동작을 실행하는 장면을 찍은 이른바 ‘삼천빡 동영상’은 많은 네티즌들에게 감동을 준 바 있다. 그전에는 고시원에서 4년을 살았다는데 유명해진 이후의 형편은 어떤지 물었다.“아직 옥탑방에 살고 있고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작은 아파트 전세 정도는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집은 더 부자가 되어서도 살 수 있잖아요. 김대범이라는 개그맨이 좀 더 성장하는 일에 투자하면서 당분간은 옥탑방에 머무를 예정입니다.”요즘은 취미로 주식 투자도 하고 있다. 주식을 샀더니 세상 사는 재미가 더 늘었다. 처음 몇 주는 도박하는 사람처럼 빠져들었다가 이제는 원칙을 지키며 투자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전한다.“펀드와 주식에 투자하면서 내가 모르고 살았던 분야가 참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게 됐습니다. 생활 반경이 좁고 게으르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반성했어요. 주식 하나로도 뉴스 보는 재미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되네요.”한편 레드펌킨과는 별개로 김대범의 이름을 건 식당 개점을 눈앞에 두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김대범이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지자 함께 사업을 하자는 요구도 많이 들어왔다. 대부분 술집을 비롯한 요식업에 동업하자는 제의였다고 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업성이 없는 아이템들이었다.“이익은커녕 제 이미지를 망칠 것 같은 사업들도 많았습니다. 인기가 아무리 많아도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 시원치 않으면 금방 망하잖아요. 연예인 얼굴을 보러 사람들이 찾아오는 건 길어야 한 달이라고 봅니다.”나름의 주관이 확고한 그가 지금 준비 중인 식당은 시내의 목 좋은 자리를 물색 중인 단계다. 정말 맛있는 아이템을 발견했기 때문에 식당을 개업하려 한다는 그는 요리사 출신이라는 놀라운 이력을 털어놓았다.“스무 살에 다니던 대학교를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해 개그맨 시험을 봤어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웃긴 줄로만 알았는데 웃긴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요. 당장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주방장까지 하게 됐죠. 군대도 장교 식당 취사병으로 복무했어요. 지금도 파스타를 비롯한 웬만한 요리는 자신 있습니다.”제대 후에는 방송 관련한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하며 조금이라도 개그맨의 꿈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그중에 한 홈쇼핑의 카메라 보조로 일하며 방송 용어를 알게 된 것이 현장에 익숙해지는 데 많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러던 2004년에 드디어 공채 개그맨이 됐고, 2006년에는 연예대상 우수상도 수상했다.올해 들어 그는 우리 나이로 서른이다. 새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와 똑같이 무감했단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그간의 여러 경험을 통해 자신이 노력을 아주 많이 해야 사람들이 조금 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을 체험하며 내공은 높되 마음은 늙지 않는 영원한 개그맨으로 남았으면 한다.개그맨 김대범약력: 1979년 출생. KBS 공채 19기. 출연작으로 KBS 폭소클럽,개그콘서트 ‘고교천왕’, ‘마빡이’, ‘애드리브 브라더스’ 등 있음.김희연 객원기자 foolf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