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폭등세가 이어지면서 ‘3차 오일쇼크’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970년대 초반과 후반 터진 두 차례의 살인적인 유가 급등은 세계인들의 뇌리에 악몽으로 남아있다. 실제 3차 오일쇼크가 발생하면 이번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지난해 5월 영국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2016년 오일쇼크’는 유가 급등이 몰고 올 대재앙의 시나리오를 실감나게 펼쳐 보인다.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세계 석유 공급이 증가하는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유가 상승이 시작된다. 석유 회사들은 새로운 유전 찾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중동 산유국들의 불안정성이 유가 급등의 방아쇠를 당긴다. 배럴당 85달러(1배럴=159.8리터)이던 국제유가는 160달러로 두 배 가까이 뛴다. 많은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던 자신들의 SUV를 팔려고 내놓는다. 비싼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유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선 다툼이 벌어지고, 약탈의 희생자가 늘어난다. 차를 몰고 쇼핑센터를 찾는 게 부담스러워 지면서 소비가 줄고, 경기 후퇴가 찾아온다. 트럭 운전사들도 일자리를 잃고 만다.BBC의 다큐멘터리는 2016년을 위기 시점으로 잡고 있지만 고삐 풀린 듯한 최근의 유가 상승세는 이런 상황이 예상보다 더 빨리 닥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0월 31일 미국 서부 텍사스유(WTI) 가격은 배럴당 94.45달러로 다큐멘터리에서 그리고 있는 위기 범위에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동 두바이유는 같은 날 81.3달러를 기록했다. 통상 두바이유는 다른 원유에 비해 황 함량이 낮고 휘발유 등 경질제품을 많이 뽑아낼 수 있는 WTI보다 배럴당 10달러 이상 가격대가 낮게 형성된다.장기적인 국제 유가의 흐름을 살펴보면 ‘위기’는 이미 진행 중이라는 것이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이 맞붙은 중동전쟁으로 터진 ‘1차 오일쇼크’(73~74년)는 하나의 분수령이다. 20세기 내내 1~2달러를 오르내리던 유가는 73년 2.81달러(두바이유 기준)에서 10.98달러로 2년 만에 네 배 가까이 뛰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유가 폭등은 세계경제를 2차 대전 이후 최대 불황으로 몰아넣었다. 이란의 원유 수출중단으로 촉발된 ‘2차 오일쇼크’(78~80년)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78년 배럴당 12.91달러였던 유가는 3년 만에 42.25달러로 세 배 이상 급등했다. 90년 걸프사태 발발로 한 차례 출렁거리기는 했지만 그후 국제유가는 20달러선을 중심으로 20년 이상 장기 안정세를 유지했다.이런 흐름이 깨진 건 2004년부터다. 유가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2003년 배럴당 26.79달러에서 2005년 49.37달러로, 다시 지난 10월 30일 83.64달러까지 치솟았다. 4년 만에 네 배가 뛴 셈이다. 2004년 전국은 고유가 충격으로 떠들썩했다. 당시 현대경제연구원은 두바이유가 배럴당 40달러를 넘어서면 한국경제는 ‘제3차 오일쇼크’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유가는 40달러선을 돌파한 지 오래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한 실질가격으로 따져도 이미 최고점에 바싹 근접해있다. 두바이유의 실질가격 기준 최고가는 ‘2차 오일쇼크’ 당시인 80년 11월 24일 기록한 배럴당 88.94달러다.최근 유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수요는 느는 데 생산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독일 민간 에너지 분석기관인 에너지감시그룹(EWG)은 세계 원유 생산량이 지난해를 정점으로 매년 7%씩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원유가 경제의 유일한 생명줄인 중동 산유국들은 생산량을 늘리는 데 신중하다. 미국 등 전 세계의 정유시설이 낡고 노후화된 것도 공급 부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지난 80년대 초 이후 국제유가가 하향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정유시설에 대한 투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이란 제재 가능성, 터키와 쿠르드족 간의 긴장도 석유 시장에 불안감을 높이고 있다. 이런 틈을 비집고 한 몫 잡으려고 뛰어든 국제 투기 자본들은 불안 요인을 증폭시키고 있다. 달러화 약세는 이런 흐름을 더욱 부채질한다.그러나 21세기 들어 뚜렷해진 장기적인 유가 상승의 근본 동력은 전 지구적인 산업화의 빠른 확산과 세계경제의 꾸준한 성장이다. 석유에 대한 수요가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매년 10% 가깝게 성장하는 중국, 인도 등 브릭스(BRICs) 국가들은 더 많은 석유를 필요로 한다. 이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향후 2030년까지 원유 신규 수요의 58%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물론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유가가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경제가 호조를 보이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유가 상승은 1, 2차 오일쇼크와 구별된다. 앞선 두 차례의 유가폭등은 우발적, 비경제적 사건에 의한 단기 급등이었지만, 이번에는 수요증가가 주 요인인 것이다. 이는 우발적 사건이 수습 된 후 유가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가던 과거의 패턴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뜻하기도 한다. 상승폭은 비슷하지만 상승기간은 훨씬 길어진 것도 1, 2차 오일쇼크와 다른 점이다. 이는 최근 고유가 속에서도 주식시장이 활황을 누리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고유가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겨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완화된 것이다. 80년 61.1%에 달하던 우리나라의 석유의존도 역시 43.8%(2006년)로 낮아졌다. 최근 유가가 80년에 기록한 최고치에 근접했지만, 그 사이 소득 수준은 더 큰 폭으로 증가했다. 80년 1645달러이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1만8372달러로 열 배 이상 뛰었다. 유가 부담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이는 거꾸로 향후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선을 돌파해 추가 상승할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장승규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