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이후 40년째 1위 고수 ㆍㆍㆍ박카스 '최고 효자'상품

올해로 창립 74주년을 맞은 동아제약은 1932년 창업주의 이름을 딴 ‘강중희상점’으로 출발했다.1930년을 전후해 근대적 제약회사들이 본격적으로 설립됐다. 1930년 조선의사협회가 창립됐고 조선약학교는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됐다. 박애당약국과 부민약국 등이 개업, 약국 영업이 시작됐다. 이런 상황에서 고 강중희 창업주는 25세의 나이로 의약품 도매상인 강중희상점을 종로구 중학동에 문 열었다. 1947년 제약업으로 본격화한 뒤 1949년 8월 동아제약주식회사라는 현재의 상호로 변경하면서 법인화했다.하지만 법인을 세운 이듬해인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동아제약 역시 활동을 전면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원료와 생산 기구를 챙겨 놓았던 강 창업주는 피난길에 나선 부산에서도 기업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는 의약품이 부족했고, 회사는 생산을 재개한 직후부터 순조로운 판매 실적을 올렸다. 1952년 동아제약은 생산과 판매, 직원 수에서도 1949년의 규모를 회복했다.전쟁이 끝나면서 동아제약은 다시 서울로 복귀했다. 중학동 건물은 다행히 외상은 입지 않았지만 각종 시설과 원자재, 가재도구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 결과 동아제약의 순매출액 증가율은 1954년 4월~1955년 3월 240%에 달했다. 그 직전 해의 순매출액 이익률이 0.07%였던 것과 비교하면 임직원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1957년에는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현대식 공장과 사무실을 신축했다. 각종 제약 기계를 독일에서 도입해 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 등의 항생제 생산을 시작했다. 1959년 강신호 현 회장이 독일에서 귀국했다. 항생제 기계의 도입을 위해 독일에 파견됐던 강 회장은 글로벌 트렌드를 읽으며 독특한 복합영양제 생산을 구상했다. 기존 상품과는 달리 타우린, 이노시톨 등 간장제에 비타민과 미네랄을 배합한 종합 자양강장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흡연과 과음으로부터 간장을 보호한다’는 콘셉트로 약명을 짓기 위해 고심하던 강 회장의 뇌리에 아이디어가 스쳐갔다. 유학 시절 함부르크 시청 지하 홀에서 봤던 ‘박카스’ 신상이었다. 추수와 술의 신 박카스가 제약품명으로는 파격적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제품 개발 동기와 일치하고 어감도 산뜻하다는 찬성론이 더 우세했다. 결국 1960년 제약 허가를 받은 박카스는 이듬해인 1961년 본격 발매됐다.1960년대는 비타민 전성시대였다. 전쟁과 가난으로 허약해진 소비자의 욕구에 맞춰 각종 비타민제가 개발됐다. 처음에는 정제 형태로 출시됐던 박카스는 1963년 드링크제로 재발매됐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 값은 40원. 박카스 역시 40원으로 저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비자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정제보다는 액제를 훨씬 더 선호한 소비자 성향을 간파했던 박카스D는 1964년 드링크제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과감한 마케팅 전략도 히트 상품 제조에 한몫했다. 이른바 ‘대량 판매 작전’을 펼친 동아제약은 신문과 라디오, TV에 대대적인 광고를 집행했다.1965년 980만 병이던 판매량이 1966년에는 3100만 병으로, 1970년에는 7600만 병으로 폭발했다. 최장수·최대 판매의 신화를 자랑하는 박카스의 힘으로 1967년 이후 동아제약은 제약 업계 1위 기업으로 부상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식생활 패턴이 변하면서 성인병 문제가 심각해졌다. 합성 첨가물에 대한 안전성 문제도 사회적으로 대두됐다. 소비자의 식생활에 대한 욕구가 다양해지면서 1991년 동아제약은 박카스D의 성분을 보강해 박카스F를 내놨다. 2005년에는 타우린을 2배로 보강하면서 박카스F를 업그레이드, 새로운 박카스D를 선보였다.박카스는 사회 흐름을 기민하게 반영한 마케팅으로도 유명하다. 1993년 동아제약은 ‘새 한국인’ 시리즈 광고를 내놨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그린 광고는 소비자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절 소비자의 구매력이 감소하면서 박카스F의 성장세도 둔화됐다. 주소비층이던 30~50대 남성의 지갑이 얇아지면서 동아제약은 새로운 수요를 찾아 나서야 했다. ‘영(Young) 마케팅’ 전략을 펼치며 20대 전후 젊은 층을 공략했다. 젊어진 광고와 대학생 국토 대장정’ 농촌 봉사 활동 지원 등이 효과를 거두며 박카스F의 판매 곡선은 다시 상승 커브를 긋게 됐다. 지금까지 박카스는 160억 병이 넘게 팔렸고, 팔린 박카스 병의 길이를 더하면 지구 46바퀴를 돌고도 남는다.일반의약품과 생활 건강 분야에도 수많은 베스트 셀링 상품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 액체 감기약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판피린’은 1968년 발매됐다. 판피린 하면 소비자들은 지금까지도 두건을 쓴 판피린 인형이 ‘감기 조심하세요’를 외치는 TV 광고를 떠올린다. 1960년대 말부터 도입한 캐릭터 마케팅 덕이다.1977년에는 사회 활동이 많아진 여성들을 위해 업계 최초로 체내형 생리대 ‘템포’를 판매했다. 보수적이던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충격적인 상품이었다. 그렇지만 템포는 곧 편리한 사용법과 뛰어난 품질로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생리대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1982년에는 전문 구강 관리 양치액을 국내 시장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바로 ‘가그린’이다. 잇몸에 부담을 주지 않고 간단한 양치만으로 치석과 입속 세균을 제거한다고 내세운 가그린은 이제 소비자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순환하다(Circulate)의 뜻을 지닌 써큐란 역시 동아제약의 효자 상품 중 하나다. 당시 다른 혈액순환 개선제들이 대부분 단일 성분인데 반해 1994년 출시된 써큐란은 ‘서리 맞은 산사는 동맥경화도 뚫는다’는 서양 산사에 은행잎, 멜리사엽, 마늘유 등이 복합 처방돼 있다.2005년에는 제약회사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숙취 해소제 시장에 새롭게 뛰어들었다. 알코올 분해 성분인 글루메이트와 간장 보호 성분인 밀크시슬과 과라나 추출 분말 등 성분이 함유된 ‘모닝케어’가 치밀한 연구 끝에 태어난 결과물이다. 맛이 좋아 20~30대 젊은 층이나 여성 에게도 잘 팔린 덕에 발매 1년 만에 500만 병 판매를 돌파했다.동아제약은 연구 분야에서도 국내 제약 업계를 이끌어 왔다. 1978년 반합성 페니실린계 항생물질 탈암피실린 합성에 성공한데 이어 1981년에는 베타 락탐계 항생제 제조 방법으로 발명 대상을 받았다. 1985년에는 아미노글리코사이드계 항생물질인 아미카신의 대량 합성 공정을 개발하는 등 원료의약품 국산화에 앞장섰다. 1987년에는 수출 1000만 달러를 돌파했고, 이어 미국과 중국에 현지법인까지 설립했다.1988년에 국내 최초로 KGLP(Korea Good Laboratory Practiceo 우수 연구소관리기준) 연구소를 설립, 전임상 단계까지 신약 연구를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연구 시설을 갖췄다.기존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2006년에는 불임 치료제 ‘고나도핀’을 발매, 바이오 의약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2002년에 발매한 개발 신약 위염 치료제 ‘스티렌’은 국산 신약의 성공한 모델로 평가 받는다. 2005년 발매한 세계 4번째 발기부전 치료제 ‘자이데나’ 역시 전 세계 30개국 특허 등록을 완료했다. 이효정 기자 jenny@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