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러큐스 대학의 아서 브룩스 교수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미국의 종교적 운명(America’s Religious Destiny)’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주제는 미국 대선에서 종교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는 것. 전통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약했던 민주당 후보들까지 너도나도 ‘신앙고백’을 하면서 대선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는 주장이다.브룩스 교수의 말대로 이번 대선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례적이다. 그동안 민주당 후보들은 특정 종교를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180도 바뀌었다. 종교 행사마다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신앙심이 얼마나 강한지 역설한다.2008년 대선 민주당 후보 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최근 “보수만 신앙심이 돈독하다거나 진보는 모두 독실함 대신 종교적 다양성을 신봉한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남편 빌 클린턴과의 갈등도 종교적 힘을 빌려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앙을 가졌기에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힐러리 상원의원은 또 미시시피 출신 복음주의 침례교도인 번스 스트라이더를 선거 참모로 기용했다.또 다른 민주당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지난 6월 열린 기독교 진보 단체 ‘소저너스(Soujourners)’의 종교 포럼에서 “공공 생활을 할 때 자신의 종교를 버리라는 세속주의자들의 요구는 황당한 일”이라며 “일상 대화에서 종교색을 버리면 양심과 정의를 나타내는 표현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라고 말했다. 힐러리 상원의원과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도 “1996년 교통사고로 10대의 아들을 잃은 어려운 시기에 종교가 큰 힘이 됐다”고 털어놨다.브룩스 교수는 이 같은 상황이 유럽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미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지금의 민주당 후보처럼 종교를 정치에 끌어들였다면 집권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만큼 미국인들이 유럽 사람들에 비해 종교적 성향이 강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2002년 ‘국제사회조사기구’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교회에 간다고 응답한 미국인의 비율이 프랑스인에 비해 4배 높았고 노르웨이 사람보다는 8배 높았다. ‘종교가 평화보다는 갈등을 유발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한 비율은 반대로 미국인이 덴마크 사람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브룩스 교수는 그러나 유럽에 비해 월등히 강한 종교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 대선에 종교적 수사가 넘쳐나는 것을 경계한다고 지적했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 무신론에 동조하는 미국인들도 적지 않다. 브룩스 교수는 그 증거로 리처드 도킨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의 ‘만들어진 신(영어 원제는 The God Delusion)’과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 등의 반(反)종교적인 저서가 최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점을 꼽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보수 종교계에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은 대통령 선거에서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갖고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계를 끌어안기 위해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실정(失政)으로 공화당에 염증을 느낀 기독교인들이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도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그동안의 관행을 깨기 시작한 원인이다.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보수적 종교계에 ‘부동층’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젊은 개신교도들이 지구 온난화와 성경의 창조론 해석 등에서 진보적 성향을 띠면서 민주당이 파고들 여지가 생겼다.지난 대선에서 존 케리 민주당 후보가 범한 실수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가톨릭 신자인 케리 후보는 지금까지의 민주당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대선 기간에 종교를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적 개신교단이 공화당의 부시 후보 쪽으로 몰리자 선거 운동 막바지에 뜻을 굽혀 신앙 고백 대열에 동참했지만 이미 기독교계의 표심은 케리를 떠난 후였다. 민주당 후보들의 종교적 ‘커밍아웃’이 실제로 대선에서 표로 연결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안재석·한국경제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