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 ‘따로 또 같이’ 왕중왕
지난 3월 16일 태국 방콕의 대형 컨벤션센터인 임팩 아레나에서는 가전·생활용품 전시회 ‘홈프로 엑스로’가 성대한 개막을 알렸다. 인테리어 등 가정용품 전문 유통 업체 홈프로가 주최하는 이 행사는 올해가 3회째로 이번 개회식에는 홈프로 회장단과 삼성전자 파나소닉 소니 등 각 가전 업체 임원진이 참석했으며 태국 유명 방송인이 진행을 맡았다.이날 개회식에서 박광기 타이 삼성 상무(법인장)의 자리는 VIP석의 가장 중심으로, 홈프로 임원진 바로 옆이었다. 그 옆으로 일본계 업체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나란히 자리했다. 태국 현지 언론들을 위한 기념사진 촬영 때도 박 상무는 홈프로 그룹 회장의 바로 옆자리에 섰다. 홈프로 엑스포는 신제품 전시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판매도 이뤄지는 행사로 박 상무에 대한 홈프로 측의 대우는 타이 삼성의 위상을 알게 하는 한 단면이다. 실제 쿠나웃 툼폼쿤 홈프로 사장은 현장에서 기자에게 “최근 소니 등 일본 업체는 소비자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그에 비해 삼성전자는 매우 공격적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타이 삼성 관계자는 “이 행사가 시작된 2005년만 해도 타이 삼성에 대한 대우가 이렇게 극진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최근 태국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제품이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현재 태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은 약 200개로 그중 성공적인 케이스로 인정받는 기업은 단연 삼성전자와 LG전자다.1987년 지점 형태로 태국에 첫 발을 디딘 삼성전자는 1989년에 생산 법인을, 1992년에 판매 법인을 세웠다. 현재 공장과 방콕사무소의 인원을 합쳐 2500명의 직원이 타이 삼성에서 일하고 있다. 이중 26명이 한국 직원이다.타이 삼성이 다양한 신제품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으로,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공격적으로 태국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 게 불과 5~6년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3년 전부터 태국을 6대 전략 시장(미국 독일 인도 중국 러시아 태국)의 하나로 선정하고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법인 중 매출 순위로만 보면 높지 않은 수준이지만 삼성전자 측은 동남아시아의 소비 중심지로서 태국의 잠재력이 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타이 삼성은 최근 프리미엄 시장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다양한 부류의 프리미엄 제품군이 가능한 시장이며 동남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여전히 보급형 시장에 대한 수요가 큰 태국이지만 미래 시장, 미래 소비자를 공략하는 차원에서 프리미엄 제품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는 얘기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중국, 중남미와 함께 경제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폭발적인 성장을 할 가능성이 있는 시장이라는 게 타이 삼성 측의 설명이다.타이 삼성은 더욱이 가전의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본사의 강점을 적극 활용해 광고도 태국 현지서는 드물게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콘셉트로 진행하고 있다. 이 업체는 또 태국이 동남아시아의 관문이라는 점에서 올해 초 가로 201m, 세로 18m에 달하는 옥외 광고물을 수완나품 신공항에 설치했다. 랜드마크로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게 삼성 측의 말이다.이 같은 타이 삼성의 하이엔드를 공략한 마케팅 전략은 실제 그 효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 점유율 조사기관인 GFK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의 LCD TV와 PDP TV, SBS(양문형 냉장고)는 점유율 1위에 올랐다. LCD의 경우 2005년 소니 샤프 필립스에 이어 12%로 4위를 기록했던 삼성전자의 점유율이 35%로 껑충 뛰어올라 1위를 기록했다. 22%로 2005년 1위였던 소니는 2% 오르는데 그쳐 2위로 내려앉았다.한편 LG전자의 활약도 만만치 않다. GFK 조사에서 지난해 LG전자 가전제품의 마켓 셰어는 세탁기가 23%(1위), 전자레인지가 32%(1위), 청소기가 12%(3위)인 것으로 나왔다.LG전자는 1997년 라용 이스턴 시보드(Eastern Seaboard) 공단 지역에 공장을 설립했다. 이후 세탁기, 에어컨, 에어컨 컴프레서 등으로 생산 품목을 늘려왔고 지난해 6월에는 별도 법인으로 돼 있던 공장과 방콕 사무소가 합쳐졌다. 아시아 지역 내 생산·판매의 효율성 높이기 위해서다. 그만큼 동남아시아 시장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의미다. 17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이중 17명이 한국인이다.현재 LG전자는 태국 현지에서 세탁기와 에어컨, 에어컨 컴프레서, TV를 생산하고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제품은 AFTA(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브루나이 필리핀)와 중남미 호주까지 수출된다. AFTA에는 분리형 에어컨이, 북미에는 창문형 에어컨이 팔리고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세탁기는 중국을 제외한 전 지역으로 수출되고 있다. 앞으로는 AFTA 지역과 유럽 지역, 중남미 물량을 증대할 계획이다. 한마디로 태국이 한국 중국에 이은 제3의 생산기지로서 LG전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는 얘기다. LG전자 측은 태국을 산업 인프라와 부품 인프라가 좋은 까닭에 일찌감치 ‘차이나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는 지역으로 주목해 왔다.제3의 수출 기지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동시에 내수 시장 공략에도 성공한 LG전자 태국법인의 지난해 매출액은 5억4000만 달러. 올해 목표는 7억8000만 달러다. 2010년에는 무려 16억 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한다는 각오다. 태국은 유통망이 고급화돼 있는 데다 지금의 국민소득(3000달러) 수준은 가전 제품 시장이 커지기에 딱 좋은 조건이라는 것이다.삼성전자 LG전자 외에도 포스코가 지난해 9월 태국의 동남아 지역 판매 기능과 지휘체계를 통합한 포스코타일랜드를 발족하고 수익성 확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더페이스샵 라네즈 등 화장품 브랜드도 최근 태국에 진출한 한국 업체들이다. 2005년 브랜드숍 1호점을 연 더페이스샵은 3월 14일 기준 태국 내에 10개의 매장을 보유한 상태다. 라네즈는 2006년 말 기준으로 22개의 매장을 열었다.‘크랭차이’ 등 특수문화 극복해야태국은 다른 해외 시장에 비해 가전 이외에는 한국 업체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시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의 경우도 최근에야 시장에서 제 자리를 찾고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케이스다. 특히 태국의 주요 제조업이 자동차 산업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은 태국 시장의 잠재성을 상당히 간과해 온 셈이다. 현재 태국에 있는 한국 자동차 업체는 기아자동차 조립공장 정도로, 최근에는 현대자동차의 태국 진출에 대한 소문이 방콕과 라용 등지에 무성하다. 이에 대해 현대자동차 측은 공식 입장을 밝히기를 꺼렸다.이처럼 태국이 신시장으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으면서도 한국 기업들에는 사각지대였던 이유는 일단 이미 확고한 세력을 구축한 일본 기업의 그늘 때문이다(태국 내 일본 교민 수만 봐도 30만 명으로 2만 명에 지나지 않는 한국 교민 수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기업 브랜드 이전에 국가 브랜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110만 명·2006년 기준)은 아세안과 유럽, 일본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을 태국에 내보내고 있지만 양국 간의 문화 이해도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특히 태국인들은 ‘크랭차이’, 즉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 싫어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태국인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에서처럼 몰아치면 그들은 조직에서 이탈하기 십상이다. 소비 기준도 한국과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한국에서 한때 통했던 아이템을 들고 태국 비즈니스 현장에 나섰다가는 낭패를 보게 된다. 삼성전자 LG전자 등도 현지화 전략을 구사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태국 시장에 새로 진출하는 기업(New Comer)은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태국의 특수한 사회 구조(입헌군주제)와 독특한 문화(크랭차이 등)에 대한 이해가 우선돼야 한다. 더욱이 태국의 주요 큰손 중에는 중국계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거래에 있어 인내심을 갖는 것도 필수다. 중국 사회에서 중시된다는 ‘관시(관계)’가 여기서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흔히 한국 기업인들은 소액 거래를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바로 이런 거래가 꾸준히 이어질 때 대규모 계약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것이다.다행히 한류라는 호재가 한국 기업들 앞에 청신호를 밝혀주고 있다. 2000년 <가을동화>를 시작으로 방영되기 시작한 한국 드라마는 가수 비가 출연한 <풀하우스>가 큰 인기를 끈 데 이어 지난해에는 <대장금>이 태국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를 통해 좋아진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한국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으로 이어지리라는 게 태국 내 한국 기업인들의 기대다.물론 태국은 ‘공략하기 어려운’ 시장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야만 또 다른 금맥이 기다린다는 반응이다. 박광기 타이 삼성 상무는 “가장 어려운 시장은 그만큼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라면서 “경쟁이 심한 지역에서 성공해야 다른 지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낙길 LG전자 태국법인 상무(법인장) 역시 “태국은 기업하기 쉽지 않은 나라”라면서도 “유통 발전의 성숙도를 고려할 때 동남아시아의 테스트 마켓 같은 지역 리드 시장”이라고 강조했다.주덕기 KOTRA 방콕무역관장도 “일본 기업이 40년 넘게 주도권을 쥐어 온 시장에서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제한 뒤 “하지만 이제 막 불기 시작한 한류를 계기로 일본의 근간까지는 아니어도 한국의 특성을 살린 틈새시장 공략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INTERVIEW / 조규환 킹앤아이 사장‘조급함 버려야 성공합니다.’“한국에서 성공했으니 여기서도 통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하면 큰 코 다칩니다.”태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조규환 킹앤아이 사장(55)은 태국 생활 노하우를 이렇게 요약했다.현재 그는 태국 방콕에서 여행사와 스파, 보석상, 기념품 전문점 등을 킹앤아이라는 통합된 브랜드로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 연말에는 아리랑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을 열어 외식업에도 발을 들여놨다. “현지인들에게 한국음식과 한국문화를 전하고 싶다”고 외식업 진출의 계기를 밝힌 그는 “해외에서는 개개인이 자신의 수준을 높일 때 그들이 소속된 국가의 문화도 존경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한국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던 과거와 달리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가 잇달아 방영돼 인기를 끌면서 최근 태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부쩍 좋아졌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제대로 된 음식문화를 소개하는 장소가 됐으면 합니다.”다행히 그의 바람대로 이미 아리랑 고객의 60~70%는 현지인 또는 외국 관광객들로 채워지고 있다. 킹앤아이 스파의 경우에도 한국인을 뺀 홍콩 대만 일본 등지에서 온 관광객이 80%에 달한다. 취향이 까다로운 한국인 소비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업은 오히려 더 힘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30년 전 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무역업 등 태국인을 타깃으로 한 사업에 매진했습니다. 한국에서 히트한 사업 아이템을 태국 시장에 그대로 적용했다가 낭패를 겪기도 했고요. 현지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거죠.”그는 “단순히 태국 인구가 6600만 명에 달하는 점에 착안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면서 “특히 매사에 여유가 있는 태국 문화를 이해한다면 사업 성과에 대해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태국 비즈니스의 요령을 설명했다.“한국 같으면 내 능력을 벗어난 주문량을 수주해도 물량이 많다면 어떻게 해서든 따내고 완수해내죠. 하지만 태국인들은 능력을 벗어나는 일은 쉽게 거절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단기에 성과를 내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그에 따르면 태국에서 비즈니스로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인정받는 일본인들의 경우 길게 보고 사업에 임하다보니 무리한 확장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국가의 사업자 또는 업체와 큰 편차를 보이며 성공을 거둔다는 얘기다.조 사장은 “빨리 돈을 벌어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생각 대신 태국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앞으로 사업을 통해 태국인에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