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 쏘는 남자’로 인기 급상승… 어릴 적 ‘꿈 이뤄 행복’

약력 : 1987년 KBS 신인가요제 대상. 88년 일본 소니레코드 아시아가요제 한국대표 출전. 89년 1집 앨범 ‘여백’ 발표. 90년 2집 ‘사랑 그것은 나그네 바람’. 98년 3집 ‘사랑 하나 이별 둘’. 2000년 4집 ‘사랑해서’. 2001년 5집 ‘톡톡 쏘는 남자’. KBS <가요무대> 출연 중.‘톡톡 쏘는 남자 무정한 남자, 톡톡 쏘는 남자 독한 그 남자, 사랑은 달콤해도 사랑은 달콤해도 남자는 못 믿겠더라….’최근 TV와 라디오에서 자주 들려오는 ‘톡톡 쏘는 남자’라는 트로트다. 노래방에서도 애창되는 이 노래는 수많은 인터넷 블로그에도 올라와 ‘입소문’을 타고 번지고 있다.재치 있는 가사도 가사지만, 감정이입 가득한 깊이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친근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목소리를 가진 가수는 바로 강민주다. 오묘한 목소리처럼 매력적인 외모 또한 자랑한다.“사실 데뷔한 지는 꽤 오래돼요. 87년 KBS 신인가요제에 출전해 대상을 받았습니다. 88년에는 일본 소니레코드 아시아가요제에 한국대표로도 출전했어요.”가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곤 한다. 타고난 미성을 가진 사람, 끝없는 노력을 통해 가수가 된 사람. 그녀는 이 모두에 해당된다.“부모님에게 감사할 따름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모두 노래를 참 잘하십니다. 저도 목청 좋은 집안의 내력을 물려받아,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틈만 나면 노래를 불렀어요.”대여섯 살쯤부터 불렀던 노래는 동요가 아니라 가요였다. 이수미의 ‘내 곁에 있어줘’, 이용복의 ‘그 얼굴의 햇살을’ 등이 그녀의 애창곡이었다.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노래 잘하네’, ‘참 잘하네’ 이렇게 자꾸 칭찬받아야 ‘내가 정말 노래를 잘 하는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자신이 그 정도로 잘 부른다는 걸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충남 청양으로 이사를 간 강씨에게 ‘라디오’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TV는 꿈도 꿀 수 없던 어린 시절 건전지로 작동하는 라디오를 듣고 또 들으며 건전지를 갈아끼웠다.타고난 목소리 덕에 학창 시절에는 ‘오락부장’을 도맡았다. 체육대회와 소풍날, 방학하는 날 담임선생님은 그녀에게 ‘강민주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으로 1시간을 줬다. 가요 메들리를 1시간 내내 부르던 그녀에게 친구들과 선생님은 교실이 떠나갈 듯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어릴 적부터 장래희망은 당연히 ‘가수’였어요. 가수의 꿈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죠.”부모님께 물려받은 ‘목청’은 그녀에게 장학금도 안겨줬다. 교내 웅변대회 대상 상장에는 늘 ‘강민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밖의 각종 웅변대회에서도 1등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상품으로 학용품을 수도 없이 받은 덕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용품을 사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중고교에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도 있었다. 웅변특기생으로 늘 선발돼서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맹아학교 보모로 취직해서 돈을 벌면서도 ‘가수의 길’을 꿈꿨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동창이 보컬그룹의 밴드마스터를 소개시켜 줬습니다.”보컬그룹에 들어가 ‘싱어’(Singer)로 활동하게 된 그녀는 본격적으로 연습을 했다. 보컬그룹의 막내인 신입 싱어 강민주는 팝부터 트로트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냈다. 당시 보컬그룹의 이름은 ‘필립스’. 영어이름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한자로 지은 이름이었다. ‘반드시 일어난다’는 ‘필립’(必立)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그룹 맴버들 가운데 가수가 된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사실 저는 성격이 모질고 독하지 못해요. 아등바등 살기보다 조금조금 올라가는 게 더 좋은 낙천적인 사람이에요. 천천히 올라가다 보니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적도 만들지 않게 되더군요.”요즘처럼 연예기획, 스타발굴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던 시절 가수가 되는 길은 ‘가요제’가 거의 유일했다. 87년 KBS 신인가요제에 도전했던 그녀는 윤복희의 ‘여러분’을 불러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다. 가요계의 이목을 잡아끌던 그녀는 그당시 대형 업체였던 지구레코드와 5년 계약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선보인 노래가 89년 1집 ‘여백’, 90년 2집 ‘사랑 그것은 나그네 바람’이다.“20대 초반의 나이로 연예계에서 살아남는 건 쉽지가 않더군요. 앨범은 나왔지만 홍보활동은 제가 알아서 해야 했어요. 결국 2집 앨범을 뒤로 하고 가수생활을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공백기에 그녀는 밤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TV를 보면 답답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TV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를 보면 ‘내가 저 사람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는데,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는 TV 보는 것조차 싫어졌죠.”8년간의 공백기를 깨고 결국 98년 ‘사랑 하나 이별 둘’이라는 3집 앨범을 내게 됐다. 우연히 알게 된 가수 현미의 도움이 컸다. 그녀의 재능을 아깝게 본 현미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이다. 87년 처음으로 출연했던 KBS 1TV <가요무대>에 99년부터 다시 서게 됐다. 그후 2000년에 4집 ‘사랑해서’를 발표하며 부지런히 활동했다.그녀의 이름 석자 ‘강민주’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는 ‘톡톡 쏘는 남자’라는 노래였다. 그러나 2001년 5집 ‘톡톡 쏘는 남자’ 발표 전 강민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제 노래 스타일에는 빠른 트로트인 ‘톡톡 쏘는 남자’가 맞지 않았어요. 저는 가수 김수희처럼 발라드 느낌의 느린 노래를 주로 불렀습니다. ‘맑은 허스키’라고 할까요, 목소리 자체가 느린 노래에 적합했죠.”고민을 하던 그녀에게 유명 작곡가이자 ‘톡톡 쏘는 남자’를 작곡한 박성훈 선생은 “강민주 스타일은 아니지만 한 번 ‘타락’해 보라”고 힘을 실어줬다. 결국 그녀가 이 노래를 발표하자 주변에서는 기대 반 우려 반의 반응이 나왔다. “강민주 스타일이 아닌데 왜 부르냐”는 얘기부터 “빠른 트로트를 ‘강민주화’하니 노래가 참 좋다”는 호평까지 다양했다. 마지막 판단은 결국 트로트팬, 가요팬들에게 달려 있었다. ‘톡톡 쏘는 남자’는 모든 우려를 잠재우고 결국 인기가요로 자리잡았다.“트로트는 장르 성격상 한 번 ‘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요. 가수 서주경의 ‘당돌한 여자’도 발표 후 10여년 가까이 지나 성공했어요. 대신 한 번 알려지기 시작하면 꾸준히, 오래 불려지는 게 트로트입니다.”강씨는 방송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KBS 1TV <가요무대>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이외에도 케이블TV, 라디오 프로그램에 꾸준히 출연한다.“목소리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기회가 닿으면 MC로 활동하고 싶기도 해요. 김흥국, 박미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박미선이 하루 못 나왔던 적이 있었어요. 그날 제가 대신 MC를 봤죠. 또 TJB대전방송의 2시간짜리 트로트 프로그램 MC로 무대에 서기도 했어요.”그녀는 노래연습을 어떻게 할까. 노래는 주로 ‘그녀만의 노래방’에서 연습한다. 밴에 노래방기계를 설치한 것. 집 앞에 밴을 세워놓고 그 안에서 주로 연습한다.그녀에게 앞으로의 희망과 포부를 물었다. 앞으로 신곡을 꾸준히 내며 가수활동하는 것과 강아지와 닭, 토끼를 마음껏 기를 수 있는 전원주택을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동물을 워낙 좋아해 “가수가 안됐더라면 조련사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현재 강아지 3마리를 키우는 애견가다.“가수가 제일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고 또 전국ㆍ해외공연을 다니며 여행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어릴 적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은데 꿈을 이뤘다”면서 “지금도 참 행복하고 언제나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맑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