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들어 활약 두드러져 … 여성벤처 CEO ‘급부상’

지금이야 사회 전반에서 ‘여성 파워’라는 말이 흔하게 됐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크게 달랐다. 특히 경제계에서 여성의 존재는 ‘희귀 성(性)’이나 다름없을 만큼 역할과 입지가 미약했다. 광복 60년, 한국경제 60년의 세월 동안 여성은 남성의 경제활동을 보조하는 ‘주변인’으로 맴돌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여성이 CEO인 이른바 여성기업에 사회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한 세대 남짓인 최근 10여년 동안 일어난 변화이다. 여성의 경제활동이라야 60~70년대엔 생산직 노동자, 80년대엔 사무보조원이 고작이었지만 90년대 들어 고학력 전문직 여성이 양산되고 IMF 외환위기로 창업시장이 급격히 커지면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기업 내에서 여성인재의 활약상이 두드러지는 한편, 직접 사업체를 꾸리며 성공을 일구는 당찬 여성경영자도 쑥쑥 늘어났다.더구나 90년대는 시기적으로도 여성기업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여성운동이 활성화되고, 본격적으로 여성정책이 집행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한층 높아진 까닭이다. 여기에 99년 ‘여성기업지원에관한법률’이 제정ㆍ공포돼 여성기업 지원육성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장환경이 제대로 갖춰지기 시작한 때인 셈이다. 이 당시 국내 여성기업 수는 96만여개로 전체의 34.6%선이었지만 2003년에는 115만개, 36%로 높아졌다.2000년 이후부터는 남편 대신 가장 역할을 하는 이른바 ‘허즈와이프(Husband+Wifeㆍ여성가장)’가 늘어나면서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소자본 창업 수요자 가운데 여성이 절반을 차지하면서 전통적인 여성상마저 바뀌는 추세다. 김용자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여성기업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양적으로 성장한 것은 물론 남성에 비해 탁월한 경영자질을 발휘해 성공을 일구는 확률도 높게 나타난다”면서 “여성이 기업경영에 불리하다는 것은 전통적인 인식에 근거한 착각일 뿐”이라고 강조했다.여성기업의 성장 역사는 최초의 여성경제인단체인 사단법인 한국여성경제인실업회(현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연혁에서 잘 드러난다. 1977년 몇 안되는 여성기업인을 규합해 설립된 이 단체는 28년이 지난 지금 1,300개 여성기업을 아우를 정도로 성장했다.특히 역대 수장들의 면면은 한국의 여성기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잘 보여준다. 최경자(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 이사장), 이영숙(건설업ㆍ현 명성황후추모사업단 회장), 백영자(퀸비가구 대표ㆍ작고), 이상숙(소예산업ㆍ정모제약 대표), 허복선(제일중기공업 대표ㆍ작고), 장영신(애경그룹 회장) 등 역대 회장단은 여성기업 토양을 일군 것은 물론 한국기업사에서도 큰 역할을 한 1세대 경영자로 꼽힌다.이 중에서도 특히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은 굴지의 중견그룹을 키워낸 최초의 여성으로, 칠순이 지난 지금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펴는 여장부로 이름이 높다.장회장은 가톨릭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의 체스넛힐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당시로선 보기 드문 엘리트였다. 하지만 애경유지공업의 창업주 채몽인 사장과 결혼한 뒤로는 네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보는 데 전념했다. 장회장이 경영자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타계 때문.경영에 문외한이었던 ‘주부 장영신’은 그러나 30여년 동안 애경을 손꼽히는 그룹사로 키워놓았다. 그동안 40억원대 매출은 1조8,000억원대로 늘어났고 비누 제조ㆍ판매 중심의 사업영역은 생활용품, 포장재, 화학, 유통, 레저에 걸쳐 18개 계열사, 4개 해외법인, 5개의 연구소를 보유한 중견그룹으로 커졌다.최근에는 전국 경영학과 교수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경영사학회가 1년여 동안의 연구결과물을 묶어 <장영신 연구>라는 연구총서를 발간할 정도로 경영능력과 리더십을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 물론 이 시리즈에 등장한 경영자 가운데 여성은 장회장이 처음이다.최근 눈에 띄는 것은 장회장처럼 남편 대신 경영일선에 나서는 여성기업가들이 부쩍 늘었다는 것.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박경자 울트라건설 회장, 양귀애 대한전선 고문,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 등은 지난 1년 전후해 남편 대신 기업을 맡은 ‘미망인 CEO’로 꼽힌다. 아직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엔 이르다는 평이 대부분이지만 대외활동이 거의 없다가 경영자로 변신, 의욕적으로 사업을 챙긴다는 점은 여성에 대한 재계의 달라진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여성기업인 전성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벤처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여성CEO의 본산으로 벤처와 IT업계가 첫손 꼽힐 정도다.여성이 이끄는 이른바 여성벤처는 이미 국내 벤처업계의 주류로 급부상한 상태다. 수적으로는 전체의 5% 남짓에 불과하지만 성장속도와 잠재력만은 평균을 웃돌 정도로 탁월하다는 평이다.여성벤처의 역사는 98년 전후 벤처 붐과 궤를 같이한다. 놀라운 것은 2000년 이후 벤처거품이 급속히 빠지는 와중에도 여성벤처들은 건재함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98년 설립된 한국여성벤처협회의 경우 폐업과 부도가 속출했던 2002~2003년에도 꾸준한 회원사 증가 추세를 나타냈다. 현재 한국여성벤처협회는 275개 회원사를 거느리고 있다.여성벤처 파워는 수많은 스타CEO와 동의어로 통하기도 한다. 정희자 오토피스엔지니어링 사장, 이영남 이지디지탈 사장 등 1세대 벤처CEO를 필두로 서지현 버추얼텍 사장, 김혜정 삼경정보통신 사장 등이 뒤를 잇는다. 이수영 아이콜스 사장, 박지영 컴투스 사장, 양윤선 메디포스트 사장 등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끊이지 않는 벤처갑부이자 스타들. 양인숙 한국여성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하는 벤처업계에서 여성의 활약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그만큼 시장개척의 가능성이 풍부하고 이를 잘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전문인력 풀이 풍부하고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재들이 많기 때문에 앞으로도 부가가치가 높은 지식기반산업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대단할 것”이라고 내다봤다.INTERVIEW 정명금 한국여성경제인협회 회장“여성기업이 국가경쟁력 높여”국내 여성기업을 대표하는 정명금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은 “아직도 한국은 여성이 기업하기에 어려운 나라”라며 “기업활동 현장에서 남성 위주의 유교 관념에 종종 부딪힌다”고 아쉬움을 밝혔다. 그러나 “여성인력 활용이 국가경쟁력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인식이나 제도, 정책이 긍정적으로 바뀔 것으로 본다”며 낙관적인 전망도 내놓았다.여성기업, 여성경제참여인구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데, 과거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지난 99년 여경협이 설립될 당시만 해도 여성기업은 90만명이 안됐습니다. 이제 115만명이 넘었으니 숫자만으로도 지위가 많이 향상됐지요. 특히 IMF 이후 가장을 대신해 생계를 위해 창업에 뛰어든 경우가 많았다면 요즘은 취업 대신 사업에 나서는 등 자아실현과 인생계획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여성기업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요.아직 선진국에 비해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는 데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다 뿌리 깊은 성차별도 큰 걸림돌입니다. 남성 위주의 접대문화와 금융거래시 여성기업인 본인보다 남편의 신용도를 우선시하는 풍토도 남아있어요. 취약한 사회적 네트워크 역시 극복해야 할 숙제입니다.여성기업 장려를 위해 꼭 만들어져야 할 정책이 있다면.자금, 인력, 판로 등 기업경영 본연의 문제와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면서 발생하는 문제가 적잖습니다. 여성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정책이 매우 필요합니다.특히 여성기업지원에관한법률에 의하면 공공기관은 여성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구매계획을 작성하고 구매를 촉진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판로가 많이 확대됐지만 공공구매액 수준은 미약한 상태입니다. 우수하고 참신한 여성기업의 제품들을 공공기관들이 적극적으로 우선구매해 준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또 육아문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보육ㆍ탁아시설을 확충해 많은 여성들이 보다 쉽게 경제활동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