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집권 3년차에 들어선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 행보를 눈여겨보면 좀더 뚜렸해지는 특징 한 가지가 보인다.국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가 될 만한 ‘아젠다’(Agendaㆍ의제 혹은 관심사) 설정에서 확실하게 앞서 나가면서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는 점과 정부 내 혁신 추진 등 일반 행정에서는 여전히 탈권위적 자세로 눈높이를 낮추는 행태다, 두 가지 모두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다만 임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좀더 ‘자기 스타일’로 자리잡아 나가면서 강화되는 듯한 느낌이다.‘하이 비전, 로 테크닉’(High Vision, Low Technics). 노대통령의 근래 행보를 이렇게 개념 정리해 보면 어떨까.국가, 사회적으로 주요한 아젠다를 선점해 나가는데 노대통령은 확실히 탁월한 능력이 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1호로 기록돼 버린 지난해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을 제외하고 굵직굵직한 대부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아젠다를 선점해 왔다. 경제살리기와 시장안정, 한ㆍ일간 외교 현안과 한ㆍ미 동맹의 재조정 등 국제문제, 과거사 정리 문제 등 대다수 사회적 이슈에서 앞서 선명한 목소리를 내면서 방향을 제시해 왔다는 게 중론이다. 사회적으로 다양하고 대립되는 목소리가 많은 사안일수록 더욱 그러했다.1월 연두 기자회견과 2월의 취임 2주년 기념 국회본회의장 연설 등을 통해 경제살리기 전력 정책의 방향을 설정한 이래 동반성장, 양극화 해소와 같은 과제가 모두 노무현 대통령 입에서 먼저 나왔고 독도문제에서 시작돼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심화된 한ㆍ일간 초긴장 관계에서도 전면에 나서 주도권을 행사한 것은 청와대였다. 이기준-이헌재-강동석씨 등 고위공직자들의 잇단 낙마로 한때 대통령의 인사권이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노대통령은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목소리 크기만 본다면 어디에도 지지 않을 여야 정치권이 있고, 한때 노대통령과 경쟁까지 벌였던 중진 정치인이 장관으로 들어가 있는 행정부도 있고, 늘 어느 정도 자기 목소리를 내 온 경제계까지 있지만 어느 곳이든 아젠다를 주도적으로 선점했다고 볼 만한 곳은 없어 보인다. 심지어 탄핵 때도 노대통령은 사상 초유로 직무가 정지되면서 최악의 상황에 빠졌지만 4ㆍ15총선으로 완전히 대역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이처럼 아젠다나 범사회적 관심사와 개념(Concept)을 선점하는 것은 ‘DJㆍYS’는 정치 9단, MH(노대통령 약칭)는 정치 10단’이라는 일각의 평가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물론 노대통령은 이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가령 외교문제만 해도 노대통령은 “외교가 (전략과 전술이 있는) 기교적인 일이라지만, 외교도 진실과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온 터여서 “단순히 (대통령의 직위로 인해) 아젠다에 앞서 가닥을 잡아가는 것은 아니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젠다 설정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이 비전’에 입각해 포석을 놓아가는 역량 때문이다.‘로 테크닉’(수준이 결코 높지 않은 기술)은 자세낮추기와 탈권위 주도, 변화하는 문명의 이기 최대한 활용하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거꾸로 이들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로 테크닉이라고 하는 것이다.로 테크닉의 예를 보자. 노대통령은 국민에게 직접 편지를 쓴다. 예전처럼 잔뜩 무게가 들어간 담화문이 아니다. 그냥 ‘국민들께 드리는 글’이라며 담담하고 진솔하게 써내려간 편지투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낙마했을 때도 그러했고, 독도문제가 본격화됐을 때 한ㆍ일관계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긴 장문의 대국민서신을 본인이 직접 쓴다고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 전문을 띄운다. 표현도 직설적이고 가급적 쉽게 비유하려 한다, 애매모호하고 원론적인 표현을 써 해석을 가장 그럴듯하게 하는 것으로 실세가 되고, 해석능력 순으로 측근 순서가 매겨지지도 했던 과거와는 차별된다. 자세를 낮추고 눈높이도 인터넷이 상활 속의 일부가 된 신세대들 수준과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고 스킨십을 공유하고 있다.시대는 바야흐르 ‘하이 테크’(High Tech) 시대다. 모두가 하이테크 경쟁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전력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로 테크, 혹은 중간수준의 기술로 첨단기술이 결집된 하이 테크 사회를 맞서고 오히려 주도하는 것이다. 앞서가는 전략(하이 비전)이 밀도 있게 깔려 있어 일정부분 효과를 낸다고 볼 수 있다.다만 노대통령이 너무 많은 부문에서 다양한 사회주체를 제치고 아젠다를 선점해 버리는 데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다원화된 민주사회의 지향점과는 거리가 있는 행보라거나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지적과 궤를 같이 한다.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각각의 수준에 맞는 아젠다를 설정하도록 다소간 뒤로 물러설 필요성이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