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은 명절 때마다 TV에서 빠지지 않는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비롯한 외국 마술사들의 솜씨만 지켜봐야 했던 처지였지만 올해 추석 때는 사정이 달랐다. 23살의 한국 젊은이가 명절날 마술 프로그램을 접수한 것이다. 바로 신세대 마술사 이은결이다.이은결 없이는 한국마술을 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그의 시작은 초라하기만 했다. 밤무대 외에는 공연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시절, 밝은 무대에 서고 싶었던 이은결은 첫 무대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선택했다. 사물놀이패와 록밴드가 막강한 음량으로 행인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목청을 돋워가며 소리를 질러대도 봐주는 이는 없었다. 기껏 좋은 자리를 잡았다 싶으면 여지없이 경비원들에게 쫓겨나며 무명과 무관심의 설움을 맛봐야 했다.“그러다가 연예인들과 함께하는 이벤트 무대에 서게 됐죠. 연예인이 등장하면 중간에 그냥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어요. 30분 공연을 하려고 2시간 넘게 준비를 했는데 중간에 공연을 끊어야 하고 다시 공연을 시작해도 연예인이 간 뒤에는 객석이 텅 비곤 했죠.”하지만 2002년 미국 마술협회가 주최한 마술대회에서 이은결이 그랑프리를 차지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한국마술 뭐 볼 게 있겠느냐’던 싸늘한 시선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이후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이은결 개인은 물론 마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면서 마술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사실 그동안의 무관심에 비하면 최근의 마술 붐은 매우 경이롭다. 인터넷 마술 동호회원이 수십만명에 달하고 마술용품을 취급하는 인터넷쇼핑몰이 100여개가 넘는다. 대학에는 마술학과가 생겨났고 국내 최초의 마술전문 극장, 마술테마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단순한 호기심거리였던 마술이 마술용품산업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업계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1~2년 사이에 한국이 온통 마술에 빠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이에 따라 마술사의 위상도 크게 달라졌다. 마술사도 이제 오디션을 거쳐 매니지먼트사에 입사해 전문적인 기획과 관리 아래 키워지는 시대가 열렸다. 올 들어 김경덕이 미국 마술협회(SAM) 컨벤션에서 ‘올해의 신인상’을 받고, 고등학교 1학년인 아마추어 마술사 정동근이 SAM 후쿠오카 대회 클로즈업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취미가 아니라 전문직종으로서 마술사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동아인재대학교에 마술학과가 만들어진 것만 봐도 마술사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다.이은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마술사 최현우가 부모님 몰래 마술을 하다가 들켰을 때 들은 첫 마디가 “너 어느 서커스단에 다니니?”였다는 이야기도 이제는 먼 전설처럼만 들린다.아직도 현역에서 무대공연을 펼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유명 마술사는 10여명에 불과하지만 그 뒤를 받치는 젊은 인력의 유입과 관련시장의 확대는 주목할 만하다. 국내 최대 마술 카페인 ‘이은결의 비즈매직’은 회원수가 15만명, 다음의 마술동호회 마술학교(cafe.daum.net/magicschool)는 회원수가 13만명에 달한다.그러면 현재 한국 마술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미국의 경우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마술 전문 극장 한 곳에서만 연간 1,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마술 관련 용품 및 공연시장 규모가 수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데 비하면 한국 마술시장은 아직도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정확한 통계치가 존재하지 않지만 주요 업체들의 매출액을 대략 합산해 보면 마술용품시장이 100억원, 학원 및 공연 등을 합한 규모가 100억원 이내다. 전체 시장이 연간 200억원을 크게 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다.마술용품시장은 완구업체가 취급하고 있는 부문을 제외하고 현재 5~6개 업체가 전문업체로서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1위를 달리고 있는 비즈매직의 경우 2001년 6월에 창업해 공연, 용품, 아카데미 등을 포함해 올해 매출 35억원을 목표로 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 회사에는 직업마술사 11명이 소속돼 활동하고 있으며 마술 아카데미 수강생도 150여명에 이른다. 이외의 업체들은 아직 마술만으로 10억원 매출을 달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소규모다. 주요 업체로는 위마인, 새로물산, 매지안 등이 있다.이들 업체는 현재의 마술용품시장이 최근 1~2년 사이에 크게 성장을 했지만 앞으로 에듀테인먼트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면 조만간 시장 규모가 1,000억원대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발빠른 변신을 준비 중이다.비즈매직의 경우에는 선두업체답게 마술의 기초인 공연시장을 다져 저변을 확대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마술사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이은결과 최현우 등이 소속돼 있는 이 회사는 국내 최초의 마술사 전문 매니지먼트회사이자 마술공연 전문기획사로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다른 공연에 찬조출연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술전문 공연을 정착시키기 위해 해마다 대규모 매직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도 12월17일부터 내년 초까지 코엑스 그랜드 컨퍼런스룸에서 열리는 이 공연의 입장료는 클래식 공연에 못지않은 5만원에서 최고 15만원에 달해 마술산업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 하고 있다. 최병락 비즈매직 대표는 “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 콘텐츠 산업”이라며 “과거 게임산업이 성장한 것처럼 마술산업도 앞으로 5년 이내에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말한다.헬로매직이라는 마술 포털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새로물산의 경우 교육분야로 사업확대를 꾀하고 있다. 현재 시사주니어 등 영어교육업체와 제휴해 판촉물로 마술용품을 제작, 배포하는 한편 영어교육의 재미를 높이기 위해 영어로 마술을 가르치고 있다. 또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탄성과 빛의 성질 등 과학적 원리를 응용한 과학마술을 강의하면서 마술용품을 과학교구재로 개발해 판매할 계획이다. 이 회사는 또 월트디즈니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있는 파티용품사업을 마술용품사업과 연계시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헬로매직 김세전 실장은 “경제상황이 개선되고 주5일 근무제 등으로 여가생활이 확산되면 엔터테인먼트산업으로서 마술산업도 크게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온라인 마케팅업체인 위마인은 마술용품사업에 뛰어든 뒤 매지안 등 마술강연 및 공연업체와 제휴해 공동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사업확대를 모색 중이다.마술이 영화관이나 식당 등에 응용되면서 새로운 사업 가능성이 늘고 있는 것도 최근의 추세다. 대학로의 판타지움은 마술을 테마로 한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며 같은 빌딩에 들어서 있는 패밀리레스토랑 ‘치퍼스’ 역시 국내에 처음 등장한 매직 테마 레스토랑이다. 앞으로 마술이 더 다양한 산업에 접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