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천이나 종이라도 그의 손이 닿으면 고급 커튼 및 벽지, 멋진 책 표지로 태어나고, 텅 빈 음산한 공간도 그의 펜 끝에서 품위 있는 화랑 분위기를 연출한다. 명동극장 미술부 수련생으로 시작해 일약 장식미술분야의 대한민국 명장으로 우뚝 선 강이환씨(52)의 얘기다. 그는 ‘예중-예고-명문 미술대’라는 일명 ‘성공코스’를 거치지 않고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알아주는 그래픽디자인 분야의 최고봉에 올라섰다. 그는 35년 동안 글로리아 담배의장, 금융실명제 포스터 등 일반 시각디자인 7,500여점, 서울지하철 등 심벌 35개, 책 표지 디자인 2,500점 등 포함, 모두 1만여점에 이르는 작품을 쏟아냈다. 지금은 기능대회 장식미술분야 분과장을 맡고 있고, 프리랜서로 일하며 가끔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그의 청소년 시절은 불우했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매형의 의정부 화실에서 일을 배웠다. 중학생 시절 그나마 심취해 있던 그의 미술 취미를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화실에서 라디오의 뉴스를 듣다가 자신의 꿈, 즉 그래픽디자이너의 길을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명동극장 미술부 소속의 유승갑씨가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디자인부문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순간 저거다 싶었어요. 일단 상금도 100만원이나 됐지요. 당시 이 정도의 상금이면 서울시 도봉구 일대에서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기능경기대회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어요.”당시 그의 매형은 명동극장 미술부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는 매형 소개로 명동극장 미술부에 들어가 유승갑씨 밑에서 일을 배웠다. 당시 그의 봉급은 3,000원. 그는 1969년 경인지방 기능대회 제도디자인부문에 참가해 아깝게 4등에 그쳤다. 나흘간 연습한 것치고 괜찮은 성적이었지만 시간이 5분 모자라 완성도를 높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밤새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71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기어코 금메달을 땄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도 손이 굳을 것을 염려해 몰래 오른손을 탁자 밑으로 내려 마치 펜을 잡고 선을 긋는 연습을 수없이 할 정도로 전념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상금으로 받은 10만원으로 약수동에 셋방을 얻었다.73년에 그는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는 동메달을 따며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국내에 그래픽디자인을 최초로 도입한 김교만 서울대 미대 교수 밑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김교수와 함께 서울시 지하철 비주얼 디자인을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작품이 고등학교 미술교재 작품으로 실리는 등 유명세를 탔다.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한 것이다.“이젠백 맥주회사에서 받은 월급은 6만원이었어요. 그러나 계속 회사를 옮길 때마다 두 배로 뛰었습니다. 초임 월급이 금호건설에서 17만원을 받았고, 명진에서 35만원,<주부생활>에서 55만원을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때 제가 돈 많이 번다고 주위에서 ‘돈이환’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88서울올림픽 때는 조직위에서 팀장으로 나를 불렀지만 당시 내가 기존 직장에서 받았던 봉급이 국장급보다도 많아 말로 그치고만 말았습니다.”금호건설에 근무할 당시 그는 처음으로 공사장 펜스에 그래픽디자인을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공사장 펜스라고 해봐야 고작 안전망을 치는 것에 불과했기에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그후 몇 년 지나 각 건설사들이 미관을 위해 공사장 펜스에 그래픽디자인을 넣는 것을 보고 아쉬워했다고 한다.그는 회사에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여러 대회에 참가, 각종 상을 휩쓸었다. 국제 관광콘테스트 포스터 특선(74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특선(75년), 한국시각디자인전 대상(77년) 등.78년 그는 명지전문대학에 입학했다. 성공가도를 달려온 그였지만 전문적인 미술공부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입학한 해에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는 황창배 교수로부터 정밀묘사 과제가 떨어졌다. 그는 참새를 그렸는데 얼마나 실감이 났던지 황교수가 참새 깃털 부분에다 대고 휘날릴까 싶어 바람을 불어봤을 정도였다고 한다.그는 91년 <주부생활>을 나와 개인 사무실을 차렸다. 그는 95년 한 중소기업이 자신이 제공한 넥타이, 스카프 등의 패키지 디자인으로 엄청난 수출실적을 올려 그해 수출 기념탑을 받은 것을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한다. 그는 98년 남들처럼 IMF 유탄을 맞아 개인 사무실을 접고 프리랜서로 지금껏 뛰고 있다.그는 젊은 그래픽디자이너들이나 새로 도전을 꿈꾸는 신인들에게 ‘자연을 보고 느끼라’고 조언한다. 자연의 이치, 예컨대 강약, 높낮이를 제대로 알면 일단 절반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그는 디자인 연구를 오랫동안 하다 보니 동양철학의 이치를 터득하게 됐다고 한다.“우리가 흔히 명산이라고 하는 산을 보면 그 나름대로 강약과 높낮이가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같은 조화가 작품에도 그대로 살아나야 극히 자연스럽고 잘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는 요즘 젊은 그래픽디자이너들의 작품은 깊은 맛이 안난다고 개탄한다. 새롭다며 어설프게 꾸민 문양을 자의적으로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짙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컴퓨터그래픽에만 의존하는 것이 보기에 안 좋다고 고개를 가로젓기까지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손으로 그리는 디자인 쪽으로 유턴하고 있다고 귀띔한다.그는 심벌에도 운명이 있다고 주장한다.“ㄱ건설, ㅎ은행, ㅎ철강회사들이 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심벌 자체에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거든요. ㄱ건설의 경우 심벌이 마치 목을 죄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ㅎ은행은 마치 불이 꺼져 가는 모양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모 맥주회사의 심벌만을 보고 주위사람들에게 망한다고 했어요. 아주 차가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예측대로 되더라고요.”그의 가기(家旗)론도 특이하다. 가정을 상징하는 깃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집안에 기강이 선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집안에 사람이 앞으로 진취적으로 나가는 형상의 깃발을 만들어 걸어 놓고 있다고 한다.그는 착시박물관을 차리고 싶어 한다. 생선 등을 굽는 석쇠에 계란 프라이를 하는 장면, 도마에 칼이 마치 회처럼 잘게 썰어진 모습 등 물체의 착시현상을 담은 그림을 전시해 관람객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문화관광랜드도 꼭 탄생시키고 싶은 것들 중 하나다. 200만평 부지에 명장, 명인들의 작품 제작과정과 작품들을 전시하는 A랜드와 우수기능인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놓은 B랜드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그에 상응하는 부지를 내놓겠다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다며 이 대목에서 그는 신나게 말한다.그의 꿈이 언제쯤 실현될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