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 컴투스 사장ㆍ뮤지컬배우 최정원 남편 대표적
‘트로피 남편이 늘고 있다.’‘트로피 남편’(Trophy Husband)이란 몇 년 전 미국의 경제지 <포춘>이 만들어낸 신조어다.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로 가정 내 위상이 바뀌면서 성공한 아내를 위해 가사와 육아를 대신 책임지는 남편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1980년대 말 <포춘>이 커버스토리로 보도해 화제를 모았던 ‘트로피 와이프’의 대칭 개념으로 트로피와이프는 성공한 중장년 남성들이 수차례의 결혼 끝에 트로피를 획득하듯 얻은 젊고 아름다운 전업주부 아내라는 의미다.<포춘>에 따르면 존재조차 불투명했던 ‘트로피 남편’들이 최근 급속히 늘었다. 이 잡지는 이 용어를 소개하면서 <포춘>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미 여성사업가 50인 중 3분의 1이 ‘트로피 남편’을 가졌다고 소개했다. 또 <포춘>이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각계 정상급 여성 중 30%도 남편들이 가사와 육아를 돌보고 있다고 전했다.미국 내에서 트로피 남편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알려진 것은 칼리 피오리나 휴렛패커드(HP) 회장과 멕 휘트먼 이베이(eBay) 사장.칼리 피오리나 회장과 남편 프랭크 피오리나는 AT&T에서 함께 일하다 결혼했다. 아내가 MIT 경영대학원 특별연구과정에 입학하자 두 딸의 양육과 가사를 맡았다.이베이를 세계 최대의 경매사이트로 키운 멕 휘트먼의 활약에도 남편의 외조가 한몫 했다. 보스턴에서 신경외과의사로 근무하던 남편은 그녀가 캘리포니아의 이베이 사장으로 옮길 때 사표를 던졌다.이처럼 외조에 적극적인 트로피 남편이 최근 한국에서도 늘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한국여성의 위상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정도로 높아졌다. 이를 반영하듯 직장여성의 비율, 여성의 대학 진학률 등도 함께 올라가는 추세다. 외조형 남편의 증가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박지영 컴투스 사장(29)은 대표적인 벤처업계의 여성인사로 손꼽힌다. 모바일게임업체 컴투스를 시작한 뒤 승승장구하면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매스컴에도 수시로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됐다.박사장은 남편 이영일씨(30)와의 결혼스토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씨와는 대학동기로 학창시절부터 일과 사랑을 함께했던 캠퍼스 커플 출신 부부다. 남편은 회사의 기술책임이사(CTO)로 일해오다 지난해 컴투스가 중국시장에 진출하면서 중국법인을 책임지고 있다.두 사람은 창업파트너지만 박사장이 여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박사장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든든한 뒷받침이 돼 주는 것이 이이사의 역할이다. 박사장은 “누가 누구를 도와준다는 의미보다는 서로 완벽한 파트너이자 보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오히려 사업아이디어는 나보다 더 많이 낸다”고 자랑했다. 그녀는 가사분담에 대해서도 “남편은 보통의 남편들이 생각하는 아내의 역할은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최근 국내에서 가장 각광받는 산업분야인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도 외조형 남편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국내 최정상급 뮤지컬배우인 최정원씨(35)의 남편 임영근 쇼이스트 이사(35)의 외조는 ‘유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그는 MBC문화사업부 PD와 영화ㆍ공연 투자사 코리아픽처스의 공연팀장을 거쳐 지난해 공연 투자 에이전시 쇼이스트를 설립했다. 임이사의 외조는 기본적으로 ‘아내 최정원’보다 ‘배우 최정원’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 임이사는 최씨가 공연을 앞둔 시점이면 “배우로서 공연장에 들어가면 집안일은 모두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배우는 배우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배우가 경제논리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따라서 “결혼 7년차지만 아내는 전기요금, 가스요금을 내러 은행에 간 적이 없다”는 게 임이사의 말이다. 현실문제로 고민하지 말라는 배려 차원에서다. 아내의 공연을 보고 모니터하는 일은 기본이다. 모니터 수첩이 따로 있을 정도. 매 공연 평균 10회 이상 관람하고 장단점을 아내에게 지적해준다. 임이사는 “공연 중 지적할 사항을 메모해 두었다가 막이 내린 뒤 아내에게 말해준다”면서 “결혼생활 중 아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때가 바로 이 순간”이라고 말했다.이 같은 남편들의 외조성향은 젊은층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장기적인 인생설계가 절실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부부들 중 과감히 아내의 성공을 선택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회사원 양모씨(32)는 남편의 권유로 경영학 석사(MBA)에 도전할 예정이다. 내년 입학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선생님이자 매니저다. 양씨는 늘 개인휴대단말기(PDA)를 들고 다닌다. 영어청취 훈련을 위해 남편이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영어방송 MP3 파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집안일 걱정은 접착메모지인 포스트잇으로 해결한다. 아내의 학습시간 부족을 걱정하는 남편은 가사업무는 잊으라고 말한다. 포스트잇은 양씨가 해야 할 일을 적어두는 도구다. 이것을 보고 남편이 가사를 처리한다.가사업무에 대한 부담을 확실히 덜어주는 것은 바로 이 트로피 남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정열 한국 MSD 영업ㆍ마케팅3사업본부 이사(37)는 남성 타깃 제품인 경구용 탈모제의 영업과 마케팅을 책임지는 맹렬여성이다. 그녀는 가사분담을 묻는 질문에 “거의 신경 쓰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조이사는 “‘당신이 1시간에 얼마짜리 인력인데 집안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느냐’며 ‘당신의 몸값을 인정해주는 회사에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북돋워 주는 남편의 외조가 지금의 위치까지 이끈 요인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특히 젊은 트로피 남편들은 아내의 유학을 적극 권한다. 외국계 컨설팅회사에서 근무하는 강유정씨(29)는 “요즘 부쩍 남편이 ‘유학을 떠나지 않겠느냐’는 말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MBA에 도전할 생각이 있다면 집안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강씨는 “아직까지 남편의 권유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서 “두 사람이 함께 유학할 수 없으니 언어감각이 있는 여자 쪽에서 먼저 도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실제로 최근 한국에서 MBA에 도전하는 사람 중 여성합격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따라 MBA준비학원을 찾는 여성지원자도 부쩍 늘고 있다. 정병찬 JCMBA 사장은 “올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합격자 27명 중 19명이 여자”라며 “여성이 언어감각이 뛰어나 합격에 유리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미혼 남녀의 인식도 달라지는 추세다. 지난해 말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남녀회원 48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혼남성 10명 중 3명(31.2%)이 ‘아내가 억대 연봉자라면 가사를 전담할 수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맞벌이를 원하는 남성은 10명 중 8명(79.9%)인 것으로 나왔다. 자녀가 생긴 후에 여성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55.9%).여성 역시 자신의 커리어를 발전시켜 줄 수 있는 배우자를 원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결혼정보회사 선우의 김경희 만혼담당 커플매니저는 “관리 회원 95%가 일을 갖고 있고 대부분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을 계속하기를 바란다”면서 “특히 30대 초반인 여성회원 중에는 기업체 대리, 과장으로 커리어를 쌓고 있는 회원이 많아 자신의 일을 이해해 줄 수 있는가를 배우자 선택의 우선순위로 꼽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