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1966년생.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영국 런던 시티대학교 문화정책과 경영대학원 예술행정·예술경영 졸업. 폴리미디어·프로젝트컴퍼니 대표.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겸임교수. 문화관광부, 강원도,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서 문화공간운영·지역개발·문화마케팅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선철 폴리미디어 대표(38)는 문화계에서 꽤 알려진 인물이다. 폴리미디어는 자우림, 긱스 등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한 뮤지션들의 음반을 세상에 알린 레이블이다. 이 회사에서 운영하는 폴리미디어시어터는 서울 대학로에 있는 공연전문 소극장이다. 말하자면 그의 직업은 음반ㆍ공연기획자다. 하지만 그는 굳이 자신의 직업을 ‘CEO’라고 소개한다. “파는 물건이 다를 뿐 그저 사업하는 사람”이라는 것.대학생 시절 88서울올림픽 문화축전에서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기획을 맡아 일찍부터 문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대표는 이미 고등학교 때 구체적인 직업관을 세워뒀다고 한다. 막연한 동경심이 아닌 10년 단위의 구체적인 계획도 이때 다 챙겨 놓았다. 그는 20대부터 50대까지 자신의 직업과 인생을 미리 설계해 놓았다.연주자길 포기하고 과감히 진로선회20대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이하 김덕수패)와 함께했다. 김덕수패를 만난 것은 그의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였다. 이북 출신 부모님의 열성적인 교육열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를 지내기도 했고 수영선수가 돼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둔 것은 음악이었다. 피아노를 배웠고 대학입시를 겨냥해서는 플루트를 배웠다. 그러나 음악은 공부와 달리 천부적 재능이 뒷받침돼야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고등학교 때다. 그래서 대학진학도 음대가 아닌 사회학과(연세대 86학번)로 했다.그는 “음악을 직접 연주하지는 않더라도 아무튼 그 관련 일을 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간신히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 우리나라 실정에서 ‘공연기획’이라는 게 당당한 직업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리 없다. 그래서 떠난 것이 영국유학. 영국 런던시티대학교에서 예술행정학과 예술경영학 두 가지를 전공하느라 보낸 시간이 4년이다. 그는 “사물놀이패와 인연을 맺은 당시 10여년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시간”이라고 강조했다.‘현재진행형’인 그의 30대는 ‘난장커뮤니케이션’과 ‘폴리미디어’로 압축된다. 96년에 만든 난장커뮤니케이션에서 김덕수패와 재즈밴드의 퓨전음반 ‘난장, 뉴호라이즌’으로 음반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이후 폴리미디어로 사명을 바꾸면서는 자우림을 발굴했다. 이효리, 보아 같은 대박가수는 없지만 어어부밴드, 가야금앙상블 ‘사계’ 등 음악세계가 분명한 뮤지션들이 그와 함께한다. “50만장짜리 1명의 가수보다는 5만장짜리 10명의 가수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를 ‘명품음반 기획자’라고 하기도 한다.“폴리미디어는 아티스트와는 별개로 레이블 그 자체가 부각된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폴리미디어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레이블마케팅에 성공한 셈이죠.”건강 잃은 뒤 강원도로그가 유명해진 것은 단순히 이런 그의 사업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현주소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이곡리다. 2002년부터 그는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런 기행이 그가 유명해진 또 다른 이유다.남들은 전원생활을 한다고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강원도행을 결심한 것은 건강악화 때문이었다.“2002년 한ㆍ일월드컵이 지난 뒤에 몸에 이상이 왔습니다. 뇌경색으로 마비증상이 나타났어요. 열흘간 입원을 했었는데 그 와중에도 병원은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얻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일에 매달린 때였습니다. 그런데 퇴원 후 다시 심근경색을 앓으면서 ‘이제는 정말 안되겠다’ 싶더군요.”그래서 선택한 곳이 강원도.“강원도와의 인연은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99년에 강원도 관광엑스포 행사로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 공연을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연기간과 수해가 맞물려 크게 손해를 봤죠. 그때 진 빚이 지금껏 영향을 미칠 정도지만 지금 살고 있는 ‘저만의 성인’ 교사 2,500평을 무상 임대받고 있으니 참 묘한 인연이죠.”이곳에서 건강을 되찾았다는 이대표는 “자연식을 해서인지 몸무게도 1년 만에 30㎏이나 줄었다”는 자랑도 잊지 않았다.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당시 그의 몸무게는 106㎏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채식이나 유기농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지난해 주치의를 찾았을 때는 “우리가 더 이상 할일은 없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요즘 그가 주력하는 일은 ‘강원도 띄우기’다.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강원도 일대에서 열린 제1회 대관령국제음악제 홍보를 맡았던 것도 그렇고 ‘감자꽃음악캠프’라는 이름으로 청소년 국악교육 프로그램을 만든 일도 마찬가지다. 강원도 관련 업무를 위해 ‘프로젝트컴퍼니’라는 회사도 하나 따로 만들었다. “지방에서도 문화사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게 그의 각오다.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요즘 유행하는 ‘웰빙라이프’, ‘슬로라이프’를 살게 됐지만 사실상 하는 일은 더 많아졌다. 강원도와 서울을 오가며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그의 생활은 크게 세 축으로 나뉜다. 폴리미디어 운영, 강원도살이에 하나 더해야 할 것이 선생님으로서의 삶이다. 현재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그는 “슬로라이프라는 게 실제 한가한 삶을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슬로라이프의 요령을 삶에 적용해 보자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40대의 키워드는 ‘자연’이다.20년 가까이 문화사업에만 전념해 온 그에게 매너리즘은 없을까.그는 자신의 직업을 두고 “여전히 ‘익사이팅’한 일”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예전에는 걸핏하면 밤샘작업을 해야 했지만 그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느끼는 즐거움은 예전에 생각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요즘은 특정 분야에서 제 입김이 세지고 있는 것을 느끼는 일이 짜릿합니다.”문화사업가로서 가치만 보고 투자하던 초기와 달리 지금은 ‘생존과 균형’을 중시한다. 일반 소비재처럼 단순히 수익성만 보고 투자해서는 안되는 게 문화다. 또 예술적 가치만 중시해서도 안된다. 폴리미디어 대표와 프로젝트컴퍼니 대표라는 각각 다른 명함을 갖고 수익성과 예술성의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좋다고 하는 공연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보지는 않는다. 제작자로서 객관성을 잃을까 봐서다. 그는 “문화사업은 사람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공연내용보다 이를 만드는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가수들에게 부담도 잘 주지 않는 편이다. 긱스의 보컬 이적은 그를 가리켜 ‘명예회장’ 또는 ‘왕회장’이라고 부르곤 한다.이대표는 기획자는 어떤 분야에서든 본질은 같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CEO들이 기획력이 좋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직업을 ‘CEO’라고 소개한 것도 그래서다.기독교 신자인 이대표는 50대에는 종교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한다.“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화기획자로 일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일러주고 싶어요. 제가 얻은 가장 큰 성취욕은 꿈을 실현해가는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돈키호테처럼 보여도 이렇게 사는 것이 프로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그 소재가 음악일 수도, 공연일 수도, 그리고 종교일수도 있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