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열도 개조론’은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라 숱한 화제를 남긴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총리가 1972년 취임 직후 제시했던 국정 비전이다. 60년대 고도성장 과정에서 잉태된 각종 폐해와 지역간의 불균형 발전을 해소하는 한편 새로운 국토개발을 통해 일본 열도를 살기 좋게 만들겠다는 청사진이다. 토건회사 사장을 지낸 그였으니 불도저 방식의 비판을 듣는 한이 있어도 과감한 투자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밀고나간다면 일본이 명실공히 선진국가로 탈바꿈할 것이라는 신념이 그의 가슴속에 가득했을지 모른다.그러나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는 또 하나의 ‘열도 개조론’이 힘을 얻고 있다. 일본 정부가 거창한 구호로 내세운 것은 아니지만 언론과 학계, 그리고 산업계 과학두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며 의지를 불태우는 프로젝트가 열도 곳곳에서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이오테크놀로지(생명공학)의 연구시설과 관련 사업을 한데 묶은 ‘단지’를 여러 곳에 건설해 지역산업을 진흥시키고, 이를 통해 일본을 최강의 바이오 선진국으로 끌어올리자는 야심찬 목표가 그 알맹이다.바이오를 견인차 삼아 지역경제와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곳은 현재 한두 군데가 아니다. 심장부인 도쿄와 수도권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북단 홋카이도에서 남쪽 규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지방들이 대학, 연구소와 기업의 두뇌, 자금을 결합시킨 바이오단지에 심혈을 쏟고 있다. 일본 언론에 보도된 대규모 단지, 지역만도 줄잡아 20곳에 이를 정도다.특히 고베시의 경우 바다를 메워 만든 신부도심 포트아일랜드에 시 당국이 조성한 ‘고베의료산업도시’는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피부, 혈관 등의 재생의료 분야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는 이곳에는 영국 에딘버러대학, 호주 모나슈대학과 손잡고 세포이식수술에 도전하는 호주의 한 벤처기업이 일본의 벤처기업과 공동으로 세운 합작회사가 들어서 있다. 목적은 고베를 근거지로 한 우수 연구인력의 두뇌와 정보를 활용, 연구 성과를 세계적 수준으로 한 걸음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것. 과학 분야에서 일본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리켄(이화학연구소)이 2002년 봄 문을 연 고베연구소(발생, 재생과학종합연구센터)와 2003년 초부터 환자들에게 재생의료 시술을 시작한 고베시 부설 첨단의료센터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세운 것이다. 고베연구소에서 첨단 연구와 씨름하고 있는 고급두뇌의 수는 현재 약 240명. 첨단의료센터에는 교토대, 오사카대, 고베대 등 간사이 일대 명문대학의 일류 연구진이 95년 한신대지진의 후유증으로부터 지역산업을 재건시킨다는 명분하에 함께 모여 힘을 합치고 있다.일본정부의 자금지원 확대로 관심 고조고베의료산업도시에 둥지를 튼 곳은 이들만이 아니다. 이미 50여개에 달하는 기업들이 사무소나 연구소를 이곳에 거점으로 설치해 놓고 있다. CT, MRI 등 단층촬영기에서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GE요코가와 메디컬시스템은 오사카에 있던 간사이 지사를 2003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 회사의 나가사와 기요시 응용화상기술센터장은 “고베의료산업도시야말로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느 곳에 견주어도 중요도가 뒤지지 않을 공동연구 거점”이라고 강조,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에 2001년 문을 연 게이오대학의 첨단생명과학연구소는 컴퓨터를 이용한 세포 연구에서 세계적 명성을 구축한 곳이면서도 입지와 주변 환경에서 특히 화제가 되고 있다. 연구소에서 자동차로 30분만 달리면 스키장과 온천장, 해수욕장이 사방에 널려 있어서다.“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좋은 연구결과가 나올 수 없다. 연구원들이 쾌적한 생활을 누릴수록 연구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이 연구소의 도미타 마사루 소장은 “미국발 정보를 아무리 참고하고 흉내내도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아무도 하지 않은 연구를 해야 승부의 길이 보인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독창적 연구 분야에 파고들려면 굳이 대도시에 거점을 둘 필요가 없어 벽지와도 같은 쓰루오카를 찾아왔다”고 말했다.연구소에는 건설비와 운영비 등 지금까지 총 63억엔이 투자됐으며, 이를 야마가타현과 14개 지방자치단체가 분담했다. 지자체들은 앞으로 2년간 17억엔을 더 투자한다는 방침이다.쓰루오카시는 연구소가 지역경제 활성화뿐만 아니라 야마가타현의 전체 이미지 제고에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쓰루오카시 기획조정과의 한 관계자는 “세계 톱클래스 수준의 연구가 이뤄지면 이에 맞춰 여러 연구기관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고, 이는 고용과 지역경제에도 적잖은 자극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오사카에서 전차로 1시간 반을 달려야 닿는 시가현 나가하마시에 설치된 ‘나가하마 사이언스파크’는 일본 최초의 바이오전문대학이 들어선 지역으로 화제를 뿌린 곳이다. 교토의 학교법인 간사이문리학원이 모체가 돼 설립한 나가야마바이오대학이 문을 연 것은 2003년 4월. 소도시에 세워진 신설 대학임에도 불구, 13명의 교수진을 공모하는 데 무려 160명이 넘는 엘리트 과학자들이 몰려 학교의 앞날에 거는 학계의 기대가 만만치 않음을 입증했다. 지방의 무명 신설 대학이 개교 전부터 비상한 주목을 받은 것에 대해 이 학교의 요시다 다모츠 학장은 “기존 대학들과 같은 수직적 운영을 배제하고 자유로운 연구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의지가 공감을 얻은 것 같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벽촌에 가까운 소도시지만 연구환경만 양호하다면 고급두뇌들을 충분히 불러 모을 수 있음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소도시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바이오를 통한 산업 진흥의 꿈을 키우고 있지만 21세기판 ‘열도 개조론’에서는 도쿄 등 수도권 일대의 동향을 빼놓을 수 없다. 도쿄, 요코하마, 쓰쿠바 일대를 한데 묶은 도쿄만 게놈 베이(Bay)에 포진한 바이오단지는 줄잡아 7개. 리켄의 요코하마연구소와 요코하마시가 참가한 게이힌 임해재생특구와 치바현 신산업창출특구, 사이타마 바이오프로젝트, 첨단건강산업집적특구(시즈오카 암센터, 국립유전학연구소 참가) 등이 주축을 이루며 거대한 클러스터(Cluster)를 형성, 오사카 일대의 간사이 바이오산업 클러스터와 함께 일본의 바이오 강국 도약에 앞장서고 있다.일본 언론은 바이오단지가 열도 각지에 급속히 퍼진 배경에는 지난 2000년 발표된 밀레니엄 프로젝트에서 일본 정부가 연구 관련 예산을 증액, 향후 3년간 약 1조2,000억엔의 자금을 지원키로 한 것이 일차적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원된 돈의 대부분은 아직 단지 건설과 연구원들의 급료로 충당됐을 뿐이지만 지자체와 연구소들마다 바이오 강국의 각오를 다질 수 있도록 한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한편 일본 언론은 바이오 강국의 꿈이 무르익을수록 바이오산업이 미래의 일본을 먹여 살릴 또 하나의 기둥으로 뿌리내릴 것으로 점치고 있다. 바이오산업은 의료와 연구지원 분야를 합쳐 2003년 7,000억엔 정도의 시장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2002년 말 확정한 미래 국가 전략에서 바이오 관련 시장의 급팽창을 낙관하고 있다. 지자체, 연구기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예산지원만 뒷받침된다면 바이오산업은 2010년까지 100만명 이상의 고용창출 효과를 안겨주는 동시에 연간 약 25조엔의 거대 시장으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게 일본 정부의 확신에 찬 국가 전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