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게임기업체 ‘닌텐도’를 설명하는 데는 긴말이 필요치 않다. 80년대 중반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패미콘’을 선보이며 수많은 지구촌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게임산업의 신데렐라 회사이기 때문이다. 하이테크 신제품을 앞세운 소니, 마이크로소프트의 공세에 밀려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따라붙는 수식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게임기업계의 전설, 신화, 파이어니어….’기업들이라면 어느 회사나 듣고 싶어 할 찬사가 당연히 닌텐도라는 이름 석자의 앞을 장식한다. 지난 2002년에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의해 일본 최고의 우량 회사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남의 돈을 1엔도 빌려 쓰지 않는 무차입의 근육질 경영과 강력한 시장지배력, 부동의 소비자신뢰도 등이 다른 기업들의 본보기가 되고도 남는다는 이유에서였다.그러나 닌텐도를 바라보는 일본 언론의 눈길은 최근 달라졌다. 지금까지의 닌텐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언론은 닌텐도를 둘러싼 환경이 빠른 속도로 역풍으로 변하고 있다며, 닌텐도가 어디로 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고비를 맞은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 이대로 가다가는 평범한 기업으로 전락할 게 뻔하다면서 닌텐도의 묘수를 주목하고 있다.일본 언론과 게임산업 전문가들이 진단한 닌텐도의 위기는 한마디로 내우외환이다.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 후발업체와의 하이테크 경쟁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데다 초고속인터넷을 통한 온라인게임 보급으로 영업 기반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 첫째 위기다. 또 하나는 닌텐도 내부의 문제다. 엄습해 오는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과거의 명성에 안주하며 영업, 신제품 개발 등에서 구태의연한 방식을 반복한 것이 위기를 부채질했다는 것이다.일본 언론이 지적하는 닌텐도 내부의 문제는 천하태평에 가까운 회사 분위기와 위기의식 부재다. 이들은 우선 만들기만 하면 몽땅 팔리는 꿀맛과도 같은 성공 경험에 젖어 버린 탓에 닌텐도의 영업 조직에서는 오기와 집념을 찾아볼 수 없다고 혹평하고 있다.언론은 소매점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 판촉 캠페인을 제안해도 닌텐도측이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광고의 내용이 타깃 고객층과 맞지 않는다는 불만이 판매 일선에서 끊이지 않아도 닌텐도 본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2003년 연말 대목을 앞두고 전자양판점과 상가 등에서 실시한 판촉 행사가 ‘닌텐도가 웬일이냐?’는 반응을 얻었을 정도라는 것이다. 보통의 게임기업체라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성수기 판촉 캠페인이지만 닌텐도는 이를 등한시하며 콧대 높은 영업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는 게 언론과 전문가들의 비판이다.전문가들은 초고성장 가도를 일직선으로 달린 성공의 유전자가 연구, 개발에서도 오히려 걸림돌로 변해 버렸다고 말한다. 첨단 하이테크 게임기에 전력을 투구한 소니가 90년대 중반 첫 번째 고기능 제품을 투입할 때도 닌텐도는 “고객을 무시한 행위”라며 의미를 깎아내린 것이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게임은 무엇보다 누구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야마우치 히로시 전 회장(현 상담역)의 소신이 강력한 배경이 됐다. 창업자 패밀리 출신의 야마우치 전 회장은 교토의 소규모 화투제조업체에 불과했던 닌텐도를 불과 20세의 나이에 물려받은 후 완구메이커로 기틀을 닦은 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인물이다. 따라서 게임기산업의 카리스마와 같은 그의 신념에 이의를 달 사람은 닌텐도 내부에 없었으며 이러한 풍토가 연구, 개발의 업그레이드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게 언론의 분석이었다.‘재미’에 무게를 싣는 개발 정책은 닌텐도를 외톨이로 만들었다는 분석을 낳고 있다. 가정용 TV게임기의 한계를 예감한 소프트웨어 메이커들이 하나둘씩 소니 진영에 가담한데다 온라인게임 쪽으로 잇달아 빠져나가면서 닌텐도에는 쓸 만한 소프트웨어가 많지 않다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어서다. 언론은 소프트웨어 메이커들 사이에서 닌텐도를 기기메이커가 아니라 완구메이커로 조롱하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어린이들을 타깃으로 한 게임기시장에서 독보적 존재로 각광받았던 성공 체험이 성장의 걸림돌이 됐다는 뼈아픈 평가다.언론의 비판에는 닌텐도 내부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상태다. 개발부의 사카모토 가가오 과장은 “솔직히 게임을 하고 싶어도 닌텐도 제품으로 하고 싶은 게임이 없을 정도”라며 현재의 위기를 인정하고 있다. 20대 중반부터 닌텐도에 몸담으며 회사의 성공 학습을 생생히 지켜본 개발부의 아베 고로씨는 “게임기 사업 초기와 같은 신선한 경험과 도전 의지를 어떻게 후배들에게 심어줘야 할지 고민”이라고 걱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물론 눈앞에 닥쳐온 위기를 닌텐도가 외면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야마우치 히로시 전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자진해 물러나고 40대의 이와타 사토루 사장이 지휘봉을 잡은 2002년 이후 닌텐도는 나름대로 마인드와 조직의 대변화를 밀어붙이고 있다.대표적인 예가 최대의 라이벌로 불렸던 소프트웨어 메이커 ‘나무코’와의 짝짓기다. 닌텐도는 지난해 12월15일 나무코와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공동보조를 맞추기로 전격 합의하면서 게임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닌텐도가 손잡은 곳은 나무코뿐만이 아니다. 세가, 반다이 등 담을 쌓고 살며 적대시했던 타 소프트웨어 메이커들과도 연이어 제휴 계약을 체결했다. 이와 함께 창업 터전이자 아성인 교토에만 한정했던 개발 거점을 도쿄로 옮겼다.닌텐도의 변신과 관련, 일본 게임산업 전문가들은 시장 상실에 대한 위기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외톨이를 자초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경쟁기업과도 손을 잡고 힘을 합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위기의식이 닌텐도의 고개를 수그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닌텐도 같으면 타 메이커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거나 자신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사고와 전략을 바꾸려는 의지가 뚜렷이 느껴진다는 진단이다.영업 일선의 새바람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닌텐도의 영업사원들은 이제 주말마다 전자양판점 등 게임기 매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당연시됐다. 고객들 앞에서 게임기를 시범 조작해 보이고 인기 캐릭터를 앞세워 식어 버린 관심을 다시 높여 보려는 의도에서다.일각에서는 점잖은 스타일을 고수해 온 닌텐도의 고유 매력이 반감됐다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닌텐도가 이제 앉아서 하는 영업을 버리고 고객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며 게임사업 시작 후 무려 20년 만에 고객 중심으로 마인드를 바꾼 셈이라고 호의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닌텐도의 변신 실험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져다줄지는 미지수다. 라이벌 업체들과 힘을 합치는 결단은 내렸지만 아직 대박 소프트웨어는 터지지 않고 있다. 온라인게임과 휴대전화 게임의 급속한 확산으로 가정용 TV게임 인구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게임산업의 카리스마로 통하는 야마우치 전 회장도 “게임기산업이 총체적 위기 양상을 맞고 있다”고 진단할 정도다.닌텐도 직원들이 2003년 겨울 보너스로 받은 돈은 1인당 평균 약 143만엔. 일본 산업계를 통틀어 최고급 수준이다. 5,000억엔대의 연매출에 순익이 한때 1,000억엔을 넘은 적도 있을 정도의 고수익 기업이 쉽게 무너질 염려는 거의 없다.그러나 닌텐도의 내일은 일본 산업계 공통의 관심사다. 최고의 초우량 기업이 변신과정에서 겪는 시련과 행로는 다른 기업들에도 중요한 교과서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