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M&A 시장에서 큼직한 쇼핑백을 든 대한전선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최근 쌍방울을 사들였고, 진로 인수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업종에 상관없이 품질이 좋은 물건만 있으면 즉시 사들일 태세다. 이러다 보니 어느새 ‘큰손’ 소리를 듣는다. 또 ‘자금력이 되느냐’, ‘꿍꿍이가 뭐냐’ 등의 의혹도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는 주류, 부동산, 의류 등의 업종을 오가는 전방위적 투자패턴이 한몫 한데다 여러 건의 송사에 휘말려 있기 때문이다.대한전선은 상호가 말해주듯 전선업체다. (돋보기 참조) 과거에는 TV와 냉장고 등의 가전사업과 한덕생명 등 금융업도 영위했지만, 지금은 전선업이 주력이다. 전선업은 전통적인 굴뚝산업이다. 50년 가까이 제조업을 하던 회사가 M&A 시장에서 거센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회사측은 아예 ‘사금융’(대금업)을 중요한 수익모델로 잡고 있다고 공공연히 밝힌다.배경은 뭔가대한전선이 노리는 것은 뭘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대체 수익모델의 발굴이다. 우선 주력업종인 전선업이 하향세다. 대한전선의 사업군은 전선, 동소재, 스테인리스 등 세 가지다. 매출액 비중은 전선이 38.4%, 동소재 부문이 34.6%, 스테인리스 부문이 25%, 기타 2% 등이다. 인력 비중은 아직도 전선이 70%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반면 총매출액에서 전선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도 2002년에 비해 약 20% 정도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선업의 하락세는 업종 특성상 향후에도 지속될 전망이다. 보통 향후 5년 이상 마이너스 성장을 예상한다. 이는 수요가 계속 줄어들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쉽게 설명하면 전선의 최대 수요처는 공장이다. 알다시피 ‘공동화’가 우려될 정도로 국내 공장 신설이 줄어들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은 것이 M&A이다. 회사측은 이를 (사)금융업이라고 표현했다.다음으로 “풍부한 자금력 덕분”이라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 실제로 대한전선의 자금력은 중견기업치곤 가공할 정도로 풍부하다. 금융감독원의 자료에 따르면 2003년 9월 현금(현금등가물)과 단기금융상품이 400억원이다. 단기대여금은 3,644억원, 이익잉여금이 1,540억원이다. 지난해 여름 서울 시흥공장을 1,300억원에 처분했다.더군다나 대한전선은 우량회사다. 지난 68년 상장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2003년에는 1~9월까지 66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99년 이후 4년간의 순이익을 합하면 2,000억원에 육박한다. 이중 20% 정도의 배당이익을 지급했다고 하더라도 1,500억원 이상의 현금을 남긴 셈이다. 회사 관계자는 “현금보유액이 6,00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잠재 동원 능력도 뛰어나다. 알짜 부동산을 대거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안양공장 부지는 8만평이다. 평촌역 근처로 입지가 뛰어나다. 평당 500만원씩만 쳐도 4,000억원이다. 공장을 이전하고 매각할 경우 거액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본사가 입주해 있는 서울 회현동 사옥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대한전선은 막강한 자금력을 십분 동원해 투자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복안이다. 실제로 2002년 7월께 선인산업(주) 임차인조합에 빌려준 1,300억원의 연이율이 25%다. 지난해 500억원을 회수하면서 400억원의 이자수익을 거뒀다.왜 사금융인가투자를 목적으로 한다면서 쌍방울 경영권을 인수한 것이나, 법원에 진로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또한 “투자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쌍방울은 기업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서, 진로는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특히 진로의 경우 1,000억원대의 수익률을 노리고 채권매입에 나섰으나, 인수 기회가 생기면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비공개를 전제로 “(진로를) 인수하면 2,000억원대의 수익률은 거뜬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분명한 점은 고금리의 대금업을 경영전략의 큰 축으로 잡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난해 4월 르미에르건설에 빌려준 200억원에 대한 연간 이자율은 33.3%에 달한다.그렇다면 왜 뉴비즈니스 개발이나 M&A를 통해 미래형으로 사업구조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성임 기획관리담당 상무는 “그간 여러 번의 사업다각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며 “분수에 맞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실제로 과거 사업다각화 과정에 아픔이 적잖았다. TV, 냉장고 등 가전사업에 힘을 쏟았지만, 83년 결국 대우에 넘어가는 아픔을 겪었다. 금융업 진출의 발판이었던 한덕생명도 IMF 시절 유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밖에 건설업과 알루미늄업 등에도 뛰어들었지만 결국 포기하는 수모를 맛봤다.아울러 실속을 중시하는 설원량 회장의 경영스타일도 한몫 했다는 평이다. 설회장은 평소 소맷자락이 헤어진 와이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로 검소한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투자를 결정할 때도 예상 성공률이 99%라는 임원의 보고에 “실패 가능성 1%에 대한 대책이 뭐냐”고 물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무리한 경영권 인수보다는 투자수익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됐다는 것이다. 하상무는 “우리는 금융 기능이 강하다”며 “GE와 비슷한 모델”이라고 못박았다. 알다시피 GE는 세계적인 전기ㆍ전자회사로 알려져 있는 회사지만 계열사인 GE캐피탈도 세계 최대의 할부금융업체로 성장했다. GE 또한 전선업으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대한전선도 한국판 GE캐피탈을 지향하는 모양새다.현재 대한전선에서 금융업을 주도하는 있는 인물은 임종욱 대표이사 부사장이다. 회사 내에서는 “임사장이 있었기에 자체적인 금융업이 가능했다”고 볼 정도로 그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다. 임부사장은 1974년 대한전선에 입사해 30년간 경리과장, 비서실장, 경영전략실장을 거치며 탁월한 자산운용 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오너인 설원량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 법원에 투자의향서를 낼 때도 외부기관에 의뢰하지 않고 직접 주관해서 만들 정도로 실력을 갖췄다고 한다.그렇다고 대한전선이 전선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전선업은 10년 후에도 영위할 것이라는 게 하상무의 말이다. 수요는 줄어들고 있지만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만 생산비용을 철저하게 줄여서 경영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는 복안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임금피크제 도입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사금융은 꾸준하게 지속하되, 별도의 투자회사를 꾸릴 필요성은 느끼지 않고 있다. 원칙은 리스크 없는 투자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GE도 하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아직 대한전선의 목적이 M&A인지, 단순 투자이익을 노린 대금업인지 확실치는 않다. 어짜피 둘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다만 ‘전통제조업과 사금융업의 미팅’을 통해 생존전략을 추구하는 대한전선의 독특한 경영방침이 어느 정도 성공할지 주목된다.돋보기 | 대한전선은대한전선은 1955년에 설립됐다. 1950년대 재계 서열 4위였던 대한그룹(대한전선, 대한제당, 대한방직, 대한종합건설 등)의 후신이다. 한때 TV, 냉장고 등 가전사업을 영위했으나 83년 당시 삼성과 금성사의 공세에 견디지 못하고 대우에 이를 매각하고 전선업에 힘을 모았다. 최근 글로벌 경영의 일환으로 미국, 남아공, 몽골 등 현지합작법인과 중동, 동남아 등지에 해외지사를 설립했다. 설원량 회장은 그룹 창업자인 고 설경동 회장의 삼남이다. 1974년 소그룹의 분리되면서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당시 장남과 차남은 대한방직, 넷째는 대한제당을 갖고 독립했다. 최근 인수한 쌍방울, 무주리조트, 옵토매직 등 10개의 관계사를 두고 있다. 2003년 11월 현재 설회장을 비롯한 특수관계인이 지분의 66.42%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