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태 구분없는 대혼전 장기화 예상

외식은 집이 아닌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행위를 말한다. 일반음식점이나 패밀리레스토랑 또는 패스트푸드점이나 기타 전문식당에서 한끼를 해결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집에서 만든 음식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산 먹거리로 식사를 대신하는 일이 모두 외식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시장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섬세하고 치밀한데다 따지기 좋아하는 일본의 산업 전문가들은 외식말고도 ‘내식’(內食, 나이쇼쿠)과 ‘중식’(中食, 나카쇼쿠)이라는 말을 만들어 따로 울타리를 구분해 놓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내식은 집에서 하는 식사이되 냉동식품과 인스턴트식품 등 간단한 조리절차만 거치면 되는 먹거리로 한끼 고민을 해결하는 행위를 뜻한다. 슈퍼마켓, 편의점, 백화점 등의 매장만 가면 얼마든지 내식의 재료가 널려 있어 시장규모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크다. 외식산업 종합연구센터는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국민경제계산’의 통계치를 근거로 내식의 시장 볼륨이 지난 2001년 40조엔에 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94년에 비해서는 7.7%가 줄었지만 그래도 외식시장의 25조엔(2002년)보다는 15조엔이 더 컸다는 설명이다.하지만 일본 전문가들이 진짜 주목하는 시장은 내식과 외식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의미조차 정확한 전달이 쉽지 않은 나카쇼쿠(이하 중식)가 이들의 숨겨진 관심 대상이다. 중식은 매장에서 산 후 집이나 사무실로 갖고 돌아가 별도의 조리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먹거리나 이들 먹거리로 해결하는 식사를 뜻한다. 포장판매 형태의 도시락이나 반찬, 샐러드, 주먹밥 등이 중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대표적 상품이다. 슈퍼마켓, 편의점은 물론 도시락, 반찬전문점 등이 모두 중식 먹거리를 취급하지만 아직은 시장규모가 6조엔(2002년)으로 내식, 외식에 비해 현저히 뒤처지고 있다.그러나 전문가들이 중식 시장에 비상한 관심을 쏟는 이유는 무엇보다 눈부신 성장속도에 있다. 국민경제계산에 따르면 지난 94년에 비해 22%가 팽창했다. 비슷한 기간에 내식과 외식 시장이 모두 7.7%씩 쪼그라든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현격한 차이다.전문가들이 중식 시장의 밝은 내일을 자신하는 근거는 크게 봐 두 가지다. 우선 여성들의 사회활동 기회 확대다. 지난 80년 일본 전 세대의 26.5%에 불과했던 취업주부 가정의 비율은 2001년 39.5%까지 껑충 뛰었다. 장기불황과 이에 따른 가장들의 수입감소가 상대적으로 주부들의 취업전선 참가를 재촉했다는 이야기다. 주부들의 사회활동 확대는 필연적으로 가사노동의 감소, 기피로 이어진다. 주방에서 먹거리 장만에 쏟는 땀과 시간을 줄이고 만들어진 요리, 반찬을 식탁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또 하나의 유력한 근거는 고령화, 핵가족화다. 가족수가 줄면 먹거리 수요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고령자에게는 식사를 준비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귀찮은 일이다. 교토신용금고가 2002년 2월 간사이지방에 거주하는 여성 59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 고령일수록 중식의 큰손 고객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찬 구입을 위해 지출하는 월 액수를 비교한 조사에서 60대 이상은 4,228엔으로 톱을 차지했다. 이에 비해 20대는 2,182엔, 50대는 3,188엔에 그쳤다. 나이가 위로 올라 갈수록 반찬전문점 이용빈도가 더 높아지고 있음을 조사결과는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중식시장에 대한 전문가들의 밝은 진단은 필연적으로 시장선점을 염두에 둔 기업들의 불꽃 튀는 공방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중식이라는 신천지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한 앞으로 먹거리 시장에서 발붙이고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저마다 판로개척에 필사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중식시장을 겨냥, 배수진을 치고 나선 사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편의점업체 로손의 경우다. 로손은 지난 11월 오랫동안 반찬납품 등에서 거래관계를 유지해 왔던 식품메이커 후지코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중견업체인 후지코로서는 전체매출의 약 1할을 떠받쳐주었던 대형 거래선이 하루아침에 끊긴 청천벽력과 같은 사태였다. 로손으로부터 퇴박을 맞은 기업은 후지코만이 아니었다. 대형 유가공업체인 메이지유업과 유키지루시도 로손 매장으로부터 철수를 통고받았다. 대신 니혼수산, 큐피, 야마자키제빵 등 6개의 회사가 새로운 납품업체로 선정돼 로손과 밀월관계를 맺었다. 후지코, 메이지유업 등이 ‘관계 끝’ 통고를 받은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중식분야에서 약 40개사의 거래선을 갖고 있는 로손이 중식메뉴의 품질 향상을 위해서는 보다 경쟁력이 뛰어난 곳으로 납품업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한 때문이었다. 교체과정에서 진통과 마찰이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수십년 같은 배를 타고 온 납품업체를 야박하게 잘라낸다는 것이 어떠한 비난을 초래할 것인지를 로손측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나미 다카시 로손 사장은 “정예 멤버(납품업체)들과 손잡고 최강의 전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중식전쟁에서의 패배는 불 보듯 뻔하다”며 독한 마음을 먹도록 직원들을 몰아쳤다. 일류 백화점과 대형 슈퍼마켓, 편의점, 그리고 전문점들까지 총력전으로 한판 승부에 뛰어든 상황에서 옛정만 고집하다가는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거래선 교체를 재촉했다는 것이다.중식시장의 격전 상황을 리얼하게 비춰주는 또 하나의 거울은 이 분야의 파이어니어업체로 불리는 록 필드의 변신이다. 지난 72년 창업 후 89년 1월 고로케점을 시발로 중식시장에 깃발을 꽂은 이 회사는 92년 RF1이라는 간판으로 전문반찬점을 시작하면서 초고속의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동ㆍ서양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창의력이 뛰어난 메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보기 힘든 고품질 메뉴를 고집해 온 덕에 매출은 크지 않아도 실력에서는 일본 최정상급의 평가를 받아온 것이 록 필드의 특징이었다. 93년 4월 결산에서 170억엔이었던 이 회사의 매출은 2003년 4월 결산기에 388억2,900만엔으로 뛰었고 점포는 같은 기간에 310개까지 늘어났다.하지만 일본 최고의 명성을 누리는 상황에서도 록 필드는 거대 자본과 조직을 갖춘 대형 유통업체들의 공세에 대비, 잠시도 위기의식을 늦추지 않았다. 개선활동의 대명사인 도요타자동차를 벤치마킹의 교과서로 삼은 뒤 전문가를 파견해 달라며 매달렸다. 생산현장의 프로 도요타맨을 영입한 후 제조라인과 공정을 수술하고 감춰져 있던 각 부문의 낭비를 잡아내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물류, 배송 및 판매관리에도 메스를 가해 폐기 로스율을 종전보다 2할이나 낮췄다.중식시장에 대한 일본 기업들의 집념은 유통, 식품업체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자업체들의 중식시장을 바라보는 눈길도 바뀌고 있다. 산요전기가 지난 11월부터 시장에 투입한 신형 가정용 오븐레인지(EMO-CH7)가 본보기다. 이 오븐레인지에는 다른 회사 제품에 없는 ‘편의점 메뉴’라는 이름의 키(Key)가 달려 있으며 4개의 버튼이 배치돼 있다. 편의점에서 구입한 덮밥, 반찬 등 이른 바 중식 먹거리를 데울 때 사용하는 버튼이다.이 회사는 기존 오븐레인지의 데우기 기능의 경우 사기그릇에 담은 음식을 데우는 경우를 가정해 가열시간이 설정돼 있어 중식 먹거리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해냈다. 가벼운 포장 판매용기에 담겨진 채 오븐레인지에 들어간 음식은 사기그릇 때보다 전체 중량이 작으니 가열시간이 짧아지고 이로 인해 고루 덥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산요는 가벼운 식기에 담긴 음식용의 가열시간을 별도 설정하는 기능을 편의점 메뉴라는 이름으로 부착, 새로운 컨셉으로 선보인 것이다.일본 전문가들은 중식시장의 격전이 서막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와 함께 업태를 가리지 않은 대혼전이 장기화될 것이 틀림없지만 중식시장의 주도권을 쥔 업체야말로 전체 먹거리 시장의 리더로 각광받을 것이 확실하다고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