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규제 국가다. 난마처럼 어지럽게 얽힌 각종 규제와 법률의 사슬이 국민생활은 물론 산업계 밑바닥까지 깊숙이 깔려 있다. 경제 회생과 국가경쟁력 회복을 위해서는 규제완화를 통한 근본적 개혁이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수많은 지식인들의 지적이지만 규제 완화는 말뿐이자 흉내에 그치고 있다. 80년대 중반 나카소네 정권이 규제 완화를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고, 95년부터는 규제개혁 추진 3개년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어도 이코노미스트들은 지금도 입만 열면 규제완화를 일본 경제의 숙원 과제로 꼽는다.일본인들 특유의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식의 치밀한 일 처리 방식이 관료사회의 보신주의라는 장벽과 콤비를 이루면서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 대표적 사례다.이처럼 서행 중인 규제완화 실험에 촉매와 함께 리트머스시험지가 될 제도적 장치가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면서 일본인들의 국민적 관심을 부쩍 자극하고 있다. 10월에 또 한 차례 뚜껑이 열리는 구조개혁특구다.지난 4월21일 57건, 5월20일 60건 등 지금까지 총 117건이 인정된 구조개혁특구는 중국이 자본주의 실험을 위해 도입했던 경제특구들과 성격, 운용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일본의 구조개혁특구는 시, 구 등 지방자치단체나 일반사업자가 특정지역 내에서 일반적 규제의 적용을 피하면서 산업 진흥, 고용 창출 효과를 거두기 위해 제안한 구상을 중앙정부가 인정함으로써 설치된다. 고이즈미 총리가 본부장을 맡고 있는 구조개혁특별구역추진본부(2002년 7월 발족)가 지자체의 아이디어를 접수한 후 이를 경제산업성, 재무성 등 관련 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특구로 인정해줄 뿐 정부 차원의 세제나 보조금 등 별도의 경제적 지원은 따르지 않는다.말하자면 경제특구와 같이 범국가적 행정, 경제, 법률상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규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최소한의 편의만 주어지는 것이 일본의 구조개혁특구라는 셈이다. 이는 지자체의 자발적 아이디어와 발상을 통해 규제완화의 속도를 높이고 산업진흥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특구 인정의 기본 취지와도 무관치 않다.특구의 인정은 규제개혁추진 3개년 계획의 전 항목을 고루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외교, 국방 등 국가 주권에 관한 사항, 조약에 관한 국가 의무 이행에 저촉되는 사항 등은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 설치가 인정된 특구는 주로 산업진흥과 교육개혁, 연구개발 및 복지에 관한 것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그러나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은 중앙정부 차원의 굵직한 지원이 따르지 않는다 해도 구조개혁특구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구 실험이 일부 지역에 한정된 핸디캡을 안고 있다 해도 정부 평가를 거쳐 전국적으로 확대되면 산업진흥과 고용창출, 소득증대로 이어지며 경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 분명하다는 자신에서다. 이와 함께 창의와 개성을 살린 시험과 도전이 반복되면서 이에 따른 뉴 비즈니스 창출 효과도 상당할 것이라고 이들은 지적하고 있다.경제활동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된 미국, 유럽 등의 국가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지만 일본의 구조개혁특구는 지역과 대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이익단체들의 반발 등 장벽 넘어야물류의 경우 규슈시가 부산항과의 경쟁을 의식해, 24시간 통관, 검역이 가능한 특구로 인정받았으며 나고야도 항만관리조합이 주체가 돼 나고야항을 산업 허브로 육성하기 위한 특구 자격을 따냈다. 군마현의 중소도시 오타는 초등학교 1년생부터 국어를 제외한 전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한다는 취지로 외국어교육특구가 됐다. 도쿄의 하치오지시는 학교에 가기를 거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체험형 학교의 특구로 인정받았으며 나가노현은 만 3세부터 어린이의 유치원 입학을 허용하는 조기교육특구로 인정됐다. 일본 제일의 포도 명산지인 야마나시현은 와인산업의 진흥을 위해 주류 제조업자가 직접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특구로, 대형 석유화학단지를 두고 있는 미에현 요카이치시는 이 단지의 회생과 활용도 제고를 위해 기술직접 활용형 산업재생특구로 각각 인정받았다.히로시마현의 후쿠야마시는 헌 옷감에서 알코올을 뽑아내는 기술을 산업진흥의 기폭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끌고 있는 특구다. 버려진 헌옷과 천 등에서 면을 분리한 후 에틸알코올을 추출해내는 기업 ‘에콜로그 리사이클 재팬’을 관내에 두고 있는 이 시는 알코올사업법을 완화, 제조과정에서 얻어진 알코올을 주류 원료로 부정하게 사용하지 않도록 화학물질을 혼합한다는 조건으로 특구 인정을 따냈다.지자체의 기대와 열망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의 특구 실험이 순조로운 것만은 결코 아니다. 관련업계의 지원에 발목이 잡힌 정치권, 중앙부처 관료들의 저항과 이익단체의 반발은 특구 실험에 험난한 장벽으로 버티고 서 있다. 주식회사에 의한 병원경영특구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의료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의료보험 대상 외의 진료만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리쓰메이칸대학의 쓰노다 류타로 교수는 “규제가 뉴비즈니스의 기회를 얼마나 잡아 먹는가를 관료들이 체험해 보고 이해하지 않는 한 대담한 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야시로 나오히로 일본경제연구센터 이사장은 “특구가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지자체장의 열의가 특히 중요하다”며 “얼마나 굳센 각오와 의지로 매달리는지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INTERVIEW 시미즈 마사요시 오타시 시장“영어 능통한 인재 많이 키울 것”“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입니다. 외국인과 자유롭게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지 않고는 주도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일본 최초의 ‘외국어교육특구’로 지정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대상이 된 군마현 오타시의 시미즈 마사요시 시장(61)이 기자에게 밝힌 이유는 분명했다. 영어교육의 질을 높인다며 외국인을 일본인 교사의 보조 역할에만 머물게 한 지금까지의 교육방식은 겉치레에 불과했다고 지적한 그는 수업의 틀과 알맹이를 180도 바꾸기 위해 특구를 설치했다고 강조했다.“오타시는 인구가 14만여명에 불과한 중소도시이지만 자동차부품 등과 관련된 다국적기업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외국 근로자만 57개국, 7,000명에 달하는데 일본사회가 이들과의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외면하면 이들은 소외감만 안고 돌아갑니다.”시미즈 시장은 같은 땅에 거주하는 외국 어린이들이 일본 학교의 수업내용을 제대로 따라 가지 못하면 학교와 외국인 부모 모두가 손해라고 주장한 후 “이러한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영어에 능통한 인재를 최대한 육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오타시의 금형회사 ‘오기바라’를 예로 든 그는 “기술력이 뛰어나도 언어장애 때문에 국제회의를 리드하지 못한다면 위상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오타시가 2004년 4월 개교를 목표로 준비 중인 오타국제아카데미(가칭)는 초등학교 1, 4학년 각 2개 학급에 모두 120명의 신입생으로 출발할 계획. 일본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을 영어로 가르치며 초·중·고 12년 과정을 동일 학교에서 이수하도록 할 예정이다. 학부모와 지역사회로부터 벌써 전폭적 지지와 기대를 모으고 있으며 가나가와현, 이바라키현 등 다른 지자체들의 견학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게이오대 상학부 출신의 시미즈 시장은 고객이 원하는 것을 만들지 않으면 상품이 팔리지 않듯 행정서비스도 고객만족 개념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해 온 실천행정 경영론자. 시 행정서비스에 국제표준규격 인증인 ISO 9001을 취득했으며 지난 3월부터는 토·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서비스센터를 개설할 만큼 공직사회의 변화에 앞장서는 개혁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다. 95년 시장에 첫 당선된 후 지난 4월 무투표로 당선, 3기째 임기를 시작했다. 기회의 평등이 결과 평등을 초래한다며 일본의 교육정책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 한국에도 친구들이 많다며 한국과의 오랜 인연을 강조하는 지한파 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