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고급 양장지 원단 트레이닝복 대히트…디자인개발실 직원만 20여명

신라레포츠 박근규 사장(57·사진)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주름치마로, 서울 평화시장에서 티셔츠로 인기몰이를 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당시 업계에서 부러움을 한몸에 받은 의류분야의 기린아였다. 지금은 ‘낫소’라는 브랜드로 스포츠의류시장을 선점해나가고 있다.그에게는 일찌감치 사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추억이 있다. 경북 성주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공부에 욕심이 많았지만 그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포기했다. “끼니를 굶는 가족들을 보면서 장남인 내가 대학을 다닌다는 게 염치가 없더라고요.” 그는 군입대 전 대구대 운동장을 잠깐 밟아본 것이 대학생활의 전부다.1969년 제대한 그는 이듬해 대구 서문시장에서 1평 남짓한 가게를 열고 옷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옷을 도매상에서 떼다가 소매로 팔았다. 조금 지난 후 직접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만든 옷이 ‘주름치마’다. 이 주름치마는 얼마 되지 않아 대구지역 패션을 이끌었다. “소매상들이 주름치마를 받아가려고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 기다렸어요. 돈을 만질 정도로 재미를 보면서 서울 입성을 꿈꿨습니다.”패션의 중심지인 서울 입성을 결심한 박사장은 72년 서울 평화시장에 10평 규모의 매장을 내고 ‘미도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봉제공장도 함께 차렸다.그에게는 늘 행운이 따라다녔다. 평화시장에 가게문을 연 지 1년 만에 유명세를 탔다. 항상 손님들로 가게가 북새통을 이뤘고 나오는 제품마다 히트를 쳤다. 특히 티셔츠(브랜드 ‘백두산’)는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속옷용 천으로 만들어 착용감을 부드럽게 한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티셔츠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국에서 온 도매상인들이 현금뭉치를 들고 와서 사가곤 했습니다.” 거래처가 늘어나면서 사세도 커졌다.박사장은 지난 80년 법인전환과 함께 스포츠의류시장분야로 사업범위를 넓혀나갔다. 같은해 스포츠의류 브랜드 ‘텐넥스’(TENNEX)를 내놓았다. 그는 국내에 스포츠열풍이 불어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사업 초기에는 직원이 늘고 매장수도 증가하는 등 꽤 괜찮았다. 하지만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국내에 쏟아져 들어오는 해외 유명 스포츠 브랜드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백화점 내 매장위치는 점차 구석으로 밀려나고 쌓이는 재고와 늘어나는 은행빚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5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회사가 위기에 처하자 거래처들도 문을 닫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재고의류를 모두 3억원에 땡처리한 박사장은 직원수를 줄이고 매장수도 3분의 1로 줄이는 등 강력한 구조조정을 했다.힘든 나머지 저녁마다 포장마차에서 머리를 식혔던 그에게 93년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스포츠용품 유명 브랜드인 ‘낫소’를 의류에 접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주)낫소로부터 받았다. 당시 낫소는 법정관리 중으로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의류시장을 노크하고 있었다. 동대문시장에서 의류분야의 인지도가 높았던 박사장을 찾아와 제안하기에 이른 것이다.이렇게 해서 94년부터 출시에 들어간 스포츠의류 ‘낫소’는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줬다. 중저가시장을 공략했는데 적중했다. 롯데, 신세계 등 백화점과 일반대리점 등 전국에 50여개의 점포를 냈다. 매년 30%대의 성장을 통해 빚도 갚았다.외환위기 때 30억원 손해봐“낫소의 성공은 당시 스포츠의류시장에서도 중저가 브랜드가 먹혀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파격적이었다”고 박사장은 말했다.박사장은 외환위기가 한바탕 몰아치면서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입점한 백화점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30억원 상당의 손해를 봤다. “받아놓은 어음은 휴지조각이 되고 앞이 막막했습니다.”그는 집, 땅, 상가건물 등 전재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빚을 갚아나갔다. “외환위기 이후 치솟은 고율의 이자부담으로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어요.” 당시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게 대단했다. 박사장은 외환위기 이후 사업방식에 변화를 줬다. 탄탄한 업체하고만 거래를 하며 될 수 있으면 직영점 방식을 택했다. 이로 인해 매출이 70억원대로 떨어졌다.“외환위기 이후 3년간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자는 꼬박꼬박 내야 하는데 매출은 오르지 않고….”그는 은행빚을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빚 때문에 겪었던 쓰라림을 다시는 맛보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80년대 말 재고로 몸살을 앓았을 때보다도 힘겨웠다”고 그는 털어놓았다.고진감래라 했던가. 고생 끝에 박사장에게 기쁨이 찾아왔다. 박사장은 힘든 경영상황 속에서도 신제품 개발만은 지속해 왔다. 그가 개발한 제품이 시장에서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2001년 고급 양장지 원단을 이용해 만든 트레이닝복이 대히트를 쳤다. 유명 백화점의 스포츠의류 브랜드 매장 중 최고의 매출을 기록할 정도로 입지가 강화됐다. 덩달아 대리점도 늘기 시작했다. 올해 수출 200만달러를 포함해 150억원의 매출을 달성한다는 목표다.신라레포츠는 지난 2001년부터 중국 의류시장을 공략해 왔다. 현재 베이징, 단둥 등지에 4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사스(SARSㆍ급성호흡기증후군) 발생으로 올해는 다소 주춤하고 있지만 오는 2005년까지 중국에 30개 이상의 점포를 내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박사장은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중국시장을 공략하고 장기적으로는 동남아지역의 스포츠의류시장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중국시장은 한국 상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성공에 자신이 있다”고 덧붙였다. 올해 칭다오와 다롄에 추가로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시장 밑바닥에서부터 몸으로 겪어온 든든한 경험이 박사장의 중국시장 성공원동력이 되고 있다. 신라레포츠는 생산공장을 갖고 있지 않다. 한때 보유했던 공장도 정리했다. 대신 모든 제품을 국내외 협력업체를 통해 생산한다. 회사 차원에서는 20여명으로 구성된 디자인개발실을 운영하면서 유행할 상품만 개발하고 있다. “우리 회사의 디자인경쟁력은 뛰어납니다. 중소기업이지만 스포츠의류 분야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죠.”박사장은 의류판매업협동조합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02-2297-9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