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1일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중 한사람인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서거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케인즈는 30년대 대공황을 치유하기 위해 그때까지의 자유방임주의를 청산하고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해 거시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케인즈혁명」을 일으켰다. 그가 서거한지 50년이 지났어도 케인즈혁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케인즈의 생애와 사상등을 정운찬 서울대교수의 특별기고를 통해 알아본다.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년)의 생애는 자유와 창조를 위한 여정이었다. 케인즈는 고루한 관습과 낡은 인식의 틀에 반대했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창조적 정신이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 낼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창조적 정신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며 자신과 같이 양식있고 직관력있는 엘리트들만이 사회가 나갈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케인즈는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현실문제를 다루는데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는 전혀 오류가 없는 맹목적인 모형의설정보다는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경제적 사고의 본질이라고 강조했을 만큼 학문의 현실적용을 중시한실용주의자였고 실천주의자였다.그는 마르크스가 죽은 해인 1883년, 조용하고 목가적인 케임브리지시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을 강의하던 존 네빌 케인즈와 역시 케임브리지 뉴운햄대학 졸업생이던플로렌스 브라운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상류계급이 누리는문화적 혜택속에서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어린 케인즈의 눈에비친 아버지는 완벽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개인의 판단과 의지를존경해 주면서도 자기자신의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소년 케인즈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로부터 더욱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된다. 플로렌스는 케임브리지의 여러 사회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녀의 실천적 성격은 젊은 메이나드의 정신에 때때로 비참한 현실로부터 떨어진 사회과학자들의 추상적 학설보다도 더 깊은 감명을 주었다. 케인즈는 모친의 활동속에서 빈자와 고통받는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케임브리지의 개혁정신을 볼 수 있었다.◆ 케인즈의 생애는 자유와 창조를 위한 여정케인즈는 영국상류계급의 전통속에서 이튼(Eaton)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튼의 교육은 엄격했으며 케인즈에게 보다 크고 넓은 세계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됐다. 여기서 그는 수학에서 출중한 재능을 보여 각종 수학상을 휩쓸다시피했다. 이튼을 졸업한 뒤케인즈는 「수학에서 특히 뛰어난 학생」이란 명성과 함께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에 진학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오히려 각종 토론회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명확한 논리와 수려한 연설로 많은 학생들을 매료시켰다.이즈음 케인즈는 당대 최고 엘리트들의 모임이며 학내 비밀결사였던 「사도회(使徒會)」의 멤버가 됐다. 12명이하 회원만이 참석할수 있었던 이 모임에는 이미 러셀(Bertrand Russell) 화이트헤드같은 철학자와 스트래치 매카시 등 당대의 쟁쟁한 지성들이 재기(才氣)의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러셀은 후일 케인즈야말로 자신이 아는 인물중 가장 날카롭고 투명한 지성을 가졌다고 술회했다. 그는 케인즈와 논쟁할 때는 마치 자신의 생명을 건듯한 긴장감을 느꼈고 논쟁의 말미에는 언제나 케인즈에게 압도당한 느낌이었다고 토로했다.사도회 멤버중 케인즈를 비롯한 다수는 졸업후에도 「블룸즈베리」라는 클럽을 결성해 교유를 계속한다. 블룸즈베리 역시 배타적인엘리트 집단이었다. 그 모임에서는 신성불가침의 도덕과 기존체계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들이 교환됐다. 이런 이유로 블룸즈베리는외부인들에게 비판적 지식인들의 마피아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케인즈는 케임브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이튼에서의 명성과는 달리 일류 수학자가 될만큼의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시간이 흐를수록 공리적 접근법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졸업시험후 케인즈는 마셜의 <경제학원리 designtimesp=20903>를 읽기 시작했고 마셜은 케인즈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케인즈에게 계속 경제학 공부를 할 것을 종용했다.그러나 케인즈의 관심은 이미 상아탑을 떠나 있었다. 그는 모든 문제를 현실적 시각에서 관측하기 위해 현실세계로 뛰어들 것을 결심했다. 공무원시험에 응시한 케인즈는 다른 시험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올려 총점으로는 2위에 뽑혔으나 수학과 경제학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케인즈는 시험직후 『참된 지식이란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같다』는 탄식을 남겼고 『아마도 시험관이 나보다 경제학을모르는가 보다』는 자조적인 말을 남겼다.그는 인도청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관청의 생리는 자유분방한 천재적 재기와 맞지 않았다. 답답한 생활을 보내면서 일에 싫증을 느낀 케인즈는 마셜이 제시한 강사직을 수락해 결국 다시 킹스칼리지로 돌아온다. 케인즈는 강사로서 화폐론을 강의했다. 강사생활을 하면서 케인즈는 1909년 「지수편성의 방법」이라는 논문으로「아담 스미스상」을 받았다.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케임브리지 생활은 일단 마감된다. 그는 재무성 관리로 복직했고 전쟁기간 내내 그곳에서 일했다. 그의 탁월한 업무수행능력은 그를 전쟁이 끝난후 정부대표로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게 했다.그러나 케인즈는 승전국들이 패전 독일에 지나치게 가혹한 배상금을 책정하는 것을 보고 이런 과중한 부담이 독일을 전체주의국가로이끌고가 또다른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강화회의 결과에반대하면서 케인즈는 대표직에서 물러나 곧바로 <평화의 경제적 귀결 designtimesp=20906>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다. 케인즈가 이 소책자에서 주장한 배상금 문제의 중대성은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옳은 것으로 판명됐다.◆ 블룸즈베리 ‘비판적 지식인들의 마피아’ 악명전쟁후 케인즈는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경제학연구에 몰두하게 되며그가 남긴 경제학의 고전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나왔다. 그는1923년 <통화개혁론 designtimesp=20911>을 저술했고 30년에 <화폐론 designtimesp=20912>을 출간했다. <화폐론 designtimesp=20913>에는 그가 당시까지 만연해 있던 고전파적 수량설에 반대하고보다 실천적인 이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유명한 「기본방정식」이 실려있다.다시 세계가 2차대전의 폭풍속으로 휘말려 들어가자 그는 주저없이현실로 뛰어들었다. 재무성의 요청으로 <전비조달론 designtimesp=20914>이라는 책을저술하기도 했고 43년이후에는 국제통화기금과 국제부흥개발은행설립을 위한 회의에서 단순히 영국의 대표가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모든 정력을 불태웠다. 그러나 정력적이며 학구적이고 실천적이었던 케인즈는 46년 갑자기 재발한 심장마비 때문에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케인즈는 베를린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정리한 <자유방임의 종언, 1926 designtimesp=20915>이란 제목의 연설을 통해 자유방임주의의 허구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개화된 인간의 이기심이 항상 공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는 경제학적 영역일뿐이고 현실세계에서는 타당치 않은 허구임을 주장했다. 그는 개별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개인들은 공익이라는 선을이루어내기에는 너무나 무지하거나 미약한 존재임을 주장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유방임이 종식돼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을 강조했다. 이 글은 개입주의자(activist)로서의케인즈 진면목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경제이론은 시대의 산물이다. <일반이론, 1936 designtimesp=20916>도 예외는 아니다.거시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일반이론은 대공황이라는사건이 없었다면 탄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케인즈의 대표적 저서인 일반이론은 단순한 경제이론서는 아니다. 일반이론은 실천적경제학자의 평생에 걸친 철학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그의 이론은 완전고용을 가능하게 하는 정책적 수단의 유효성에 대한 분석일 뿐만 아니라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부와 소득의 바람직한 분배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있다. 비판자들의 주장처럼 일반이론은 논리적 정합성을 상실한 면도 있다. 케인즈 자신도 이런 사실을 어느정도 인식했다. 그러나그는 「수미일관한 논리에 의해 도달하면서도 사실과는 부합하지않는 가술에 기초해 잘못된 주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직관에 따라불명료하고 불완전하게나마 진리 찾기를 선호한 사람」이었다.케인즈는 대공황을 겪으며 기존의 고전파적 경제이론체계는 공황의핵심적 요인을 분석해 낼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전파적 세계관은가격변수의 원활한 작용을 통해 시장은 항상 균형상태에 다다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장기간 지속되는 실업은노동자나 노동조합이 균형임금 수준보다 높은 임금수준을 고집하기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며 실업문제의 적절한 대책은 노동조합 등 담합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분쇄하고 시장기구가 원활히 작동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케인즈는 불황의 원인이 과다한 부와 소득의 편중분배에 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이런 체제를 유지시키는 낡은 사상을 깨버리는 것이 자신과 같은 양식있는 엘리트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엘리트들이국민이익을 위해 사심없는 정책구상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한다는 케인즈의 가치관은 그의 출생지의 명칭을 따라 「하비 路의전제」로 알려져 있다.그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저축성향이 높아져 수요의 감소를 초래하며 이 때문에 기업가는 투자를 망설이게 되어 장기적으로 침체하게 될 것을 예견했다. 특히 불황기에는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현금의 보유를 선호하여(즉 유동성을 선호하게 되어)이자율을 낮추기 힘들므로 민간부문의 투자수요가 진작되기는 쉽지않을 것으로 보았다.케인즈는 낡은 사고의 틀을 깨고 혁신적인 사고를 지향했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진보적인 사회사상가였다. 그는 냉철한 논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진 경제학자였다.오늘날 경제학의 지나친 수리화가 자칫 제도와 인간심리를 경원시하며 자연과학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케인즈의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이 다시한번 경제학에 새바람을 넣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