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경제위기라는 어두운 터널의 끝에서 희미하게 보이는불빛은 같은 선로 위에서 마주 보고 달려오며 충돌할 위험이 있는새로운 열차에서 내뿜는 불빛임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는 듯하다.인정사정없는 경제규모 축소, 대규모의 국제적 개입에도 불구하고아시아 각국 시장의 통화가치와 주가는 계속 급전직하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통화 평가절하의 가속화는 당연히 외채상환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지난 1월초 이 지역 통화가치의 하락은 더욱 속도가붙었다. 몇몇 통화들의 대달러 가치는 하루에 10%도 넘게 떨어졌다.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는 채무기관과 해당 정부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수도 있다는 공개적인 논의까지 나왔었다.일반적으로는 위기가 닥치면 전혀 뜻하지 않은 데서 해결책이 나타나곤 하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아시아에서는 그런 메커니즘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재정긴축, 고금리, 경제개혁 활성화,IMF 지원자금확대 등 그 어느 것도 이러한 위기상황을 안정시키지못하고 있다. 이때문에 어떤 처방이 위기 중에서 어떤 부분을 더나아지게 했는지 분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시아 경제위기에서 가장 우려되는 측면은 이처럼 아무도 그 해결방안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이런 가운데서도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생각이다. 지난 97년12월7일 인도네시아 루피아화의 대달러 가치는 15%가 떨어졌고 바로 뒤이어 다음날에는 무려 18%가 또다시 떨어졌다. 그리고 지난 1월8일에는 환율이 달러당 1만루피아까지 치솟았다. 이는 1개월전에 비해 루피아화의 가치가 58%나 떨어진 것이고 전년 동기에 비해서는 75% 하락한 수치였다.(도표참조)말레이시아의 경제상황도 해외 투자자들이 보기에는 계속되는 위험신호에 다름 아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아직도 중앙은행이 곤경에빠진 은행과 기업들을 정상화시켜주기 위해 금리를 억제하고 돈을마구 찍어내고 있다. 1월 초순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는 단기외채가 적기 때문에 주변국들보다 사정이 나을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결제은행(BIS)이 밝힌 새로운 자료는 말레이시아정부로부터 대단한 이의제기를 받긴 했지만 말레이시아의 단기외채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는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실이 알려지자 말레이시아 링기트화의 가치는 1주일동안 18%가하락했다.◆ 선진 각국 ‘조화된 처방책’ 실천해야한국은 1월초 올 한해동안 성장둔화를 받아들이는데 IMF와 합의했지만 상황은 아직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중이다. 또 경제위기가이제 초기단계일 뿐인데다 지난해 11월 들어선 새정부가 경제위기를 헤쳐갈 수 있다는 신뢰를 얻고 있는 태국조차도 IMF와 이미 합의한 내용을 재협상 테이블에 올려 전면 수정해야 할 형편이 됐다.당초 합의에서 태국은 올해 GDP의 1%에 해당하는 재정흑자를 허용하고 환율은 달러당 32바트가 되도록 조정하며, 경제성장은 아주낮은 수준이 되도록 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월8일바트화는 달러당 54바트에 거래됐고 경제는 급속히 위축돼 이런 약속들이 지켜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됐다. 태국은 IMF를 통해이미 차입한 1백72억달러 이외에 또다른 차입금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뒤늦긴 하지만 태국이 자국에 요구되고 있는 모든 조건을 거의 다이행하는 가운데 몇몇 태국 정치인들은 아시아 지역 재앙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역적이거나, 아니면 보다 나은 세계적 차원의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단지 인근 국가의 정치인들로부터가 아니라 경제위기를 두려워하는 세계적 은행, 헤지펀드, 중개업체 등의 전문가들로부터도 동조를 얻고 있다.한가지 면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통화안정 없이는이 지역 경제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통화가 안정되지않으면 투자가치의 등락에 관심을 갖고 있는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를 필요한 때 유치할 수 없다. 그들로서는 투자대상물의 가치가 더떨어질 때까지 아무 행동을 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더구나 가치의 최저점을 어디 선으로 설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일치된 인식도 거의 없는 마당이다.선진 각국이 서로 조화된 처방책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얘기들은많다. 태국 부총리는 일본 엔화의 대달러 환율상승을 멈추게 한 지난 85년의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를 갱신하자고 요구하기도 했다.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강세가 오랫동안 지속됐고 믿을 수없을 정도로 비용이 덜 드는 달러차입과 일본으로부터의 대규모 투자 덕분에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큰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같은 새로운 합의가 도출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갱신될플라자 합의에 포함될 내용으로는 「새로운 환율변동 시스템을 채택하자」, 아니면 「IMF와 월드뱅크가 더욱 많은 돈을 아시아 지역에 쏟아부을 수 있도록 이들 기구의 재원을 대규모로 증가시켜야한다」는 등의 여러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다면 이 지역의 여러 국가들이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으리라는기대 아래 일본이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전문가들도 많다.사크진크로스비란 한 중개업체는 아시아 국가들이 통화위원회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것의 모델은 83년 공황때 홍콩달러를 US달러변화에 아주 밀접하게 연계시킨 통화위원회를 도입한 홍콩이다. 홍콩은 하나하나의 홍콩달러 가치를 자국이 보유하고 있는 US달러에연계시켜 보장하는 방법으로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고 있다. 그러나외환보유고가 거의 바닥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이를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크진크로스비의 한 관계자도 통화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은 자본의 이동에 대한엄격한 제한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외채의 구조를 재조정하는 것도 환율을 안정시키는 또다른 방법이될 수 있다. 단기외채 상환을 위한 달러수요가 통화가치를 무지막지하게 떨어뜨리는 큰 요인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지역의 채무자들은 채권국들의 정부가 해당 금융기관들에 압력을 행사해 자신들이지고 있는 채무의 성격을 재조정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채권 금융기관들이 만기가 돌아온 채무의 대부분에 대해 상환기간을 연장해 줬지만 그 과정은 일관성이 없고 무원칙했다.◆ 수입 줄면 달러 수요도 가라앉는다한국은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지나면서 거의 파산직전까지 갔고 오는 3월 이전에 갚아야 할 채무의 원리금이 2백40억달러에 이르렀다. 이 채무들 중 대부분은 민간부문에서 끌어들인 것이었는데 한국에 대한 채권은행들은 채권 일부를 정부가 발행하는 장기공채 형태로 전환해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민간부문 채무를 사실상 국가가 떠맡는 결과를 가져 왔다.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은 없는 가? BZW 투자은행 데스먼드 서플은 당장은 아니지만 보다 점진적으로 어떤 해결책이 정착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불능력이 있는 회사는 채무의 성격을 재조정해 살아 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회사는 파산하는 여러 과정들을 통해 전체적인 채무부담은 경감될 것이라는게 그의 견해다. 이 과정에서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상수지는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게 되고 달러에 대한 수요도그만큼 가라앉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런 과정이 진행되면서 동아시아 각국은 고통스런 경기침체를 견뎌내야할 것이다. 사실 이런 주장을 펴는 서플조차도 자신의 시나리오가경제회복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려운 상황」보다는 약간 나은 상황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그러므로 현시점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들어가 있는 터널의 끝에서 보이는 희미한 불빛은 위기탈출이라는 희망의 빛이라기 보다는같은 선로위에서 마주 보고 달려오는 위험한 열차의 불빛일 가능성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