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선수의 미국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 우승은 그저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의 나이 20세7개월. 이 나이에 세계정상에 등극하기까지 그는 꽃다운 여고시절을 스윙연습으로 날려보냈고 호랑이같은아버지의 지옥훈련도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만 했다.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밀려드는 향수병을 홀로 곱씹어야 했다.골프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마인드 컨트롤 스포츠」. 그는 다름아닌 자신과의 싸움에서승리,세계골프여왕에 당당히 등극했다. 그래서 박세리의 맥도널드LPGA대회우승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또한 눈물나게 한다.처음부터 골프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부모를 따라 미국 하와이에이민갔다 되돌아온 그는 대전유성초등학교에 입학, 허들과 투포환선수로 활약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 어떤 운동을 하든지 두각을나타냈다. 학교측에서는 내심 그를 육상선수로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골프로 전환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때인 89년말. 싱글핸디캐퍼인아버지 박준철씨(46)는 세리를 골프선수로 키울 결심을 하고 학교측을 설득, 골프채를 잡게 했다. 이때부터 「세리의 좋은날」은 사라졌다. 하루 1천개이상 볼을 때리고 15층 아파트를 걸어서 오르내리는 지옥훈련이 반복됐다. 조련사는 다름아닌 아버지. 다른 사람이라면 짜증이라도 낼만했지만 그럴 수도 없어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이런 지옥훈련을 통해 다듬어진 골프실력은 중학교 진학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 2때 코리아헤럴드배 학생대회에서 첫우승감격을 맛본 그는 그 이듬해 중고연맹회장배우승 등 내리 3승을 거뒀다. 한국 골프 차세대 주자라는 찬사는 이때부터 쏟아졌다.그러나 호랑이 아버지는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다른 아버지 같으면 격려도 해줄만하지만 더욱 매몰차게 밀어붙였다. 91년 한국여자오픈에서 쇼트퍼트 미스에 따른 불호령은 좋은 예. 이 대회에서 박씨는 세리가 1m퍼팅을 못넣고 4퍼트를 하자 그린에 어둠이 깔릴때까지 퍼팅연습을 시켰다. 세리는 이를 아버지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생각하고 묵묵히 따랐다.◆ 국내전 연승가도… 한국이 좁다고3 들어 연승가도를 달렸다. 송암배 아마추어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내리 7승을 챙겼다. 이미 그는 「프로잡는 아마추어」로성장,국내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었다. 졸업과 동시 프로로 데뷔, 동일레나운클래식 우승 등 모두 4승을 올린 것이 이를 잘 반영한다. 국내 통산 우승횟수는 22회(아마 15승, 프로7승).여기서 과감히 승부수를 던졌다. 좁은 국내무대를 뒤로 하고 본고장인 미국무대에 과감히 진출했다. 물론 그의 미국진출은 삼성물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곧바로 세계적인 레슨프로인 레드베터 문하생으로 들어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맥도날드 대회에서 위력을 발휘한 안정된 드라이버샷과 정확한 아이언샷은 스승 레드베터가 다듬어준 것이다. 한마디로 박세리의 성공신화는 천부적인 자질에, 체계적인 교육과 과감한 투자가 어우러져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