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들이 한 약속까지 뒤집는게 시장경제냐.』 김대중 대통령의이 한마디로 빅딜(Big Deal, 대기업간 사업교환)이 있다 없다를 놓고 호들갑을 떨던 재계가 단숨에 조용해졌다. 『빅딜이 논의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던 전경련은 급기야 『빅딜을 포함한 정부의 구조조정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항복선언까지 했다. 수면 밑에 숨어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빅딜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순간이다.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빅딜 구상은 현대-삼성-LG간 「3각 빅딜」. 현대가 석유화학을 LG에, LG가 반도체를 삼성에, 삼성이 자동차를 현대에 넘기는 방식이다.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의 빅딜임박발언에 대해 『빅딜은 논의한적도, 검토해본 적도 없다』며 펄쩍 뛰던 해당 그룹들은 김대통령의 질책 직후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지막까지 못하겠다고 버티던기업이 설득되자 또다른 그룹이 약속을 번복했다는 뒷얘기까지 공개된데다 빅딜을 안하면 대출을 끊겠다는 으름장까지 나오면서 결단의 시기만 남겨놓은게 확실해졌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해당 그룹들이 빅딜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는 것은아니다. 빅딜이 이뤄지더라도 결코 좋아서 하는게 아니라는 분위기다. 김대통령조차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 졸속이필요한 때』라는말을 했을 정도로 빅딜에는 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기업의 경쟁력, 나아가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일정 부분은 희생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게 지금 정부의 시각이다.기업들의 반발 이유는 역시 빅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손해다. 빅딜의 전제는 『서로에게 도움이 돼야 한다』는 것. 그러나 재계에서는 두 기업간 빅딜도 어려운데 3개 그룹간 기업 교환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거래에서 어느 한쪽이 큰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는 증거다. 더욱이 기업교환이 「마이너스 섬(Minus Sum)」 게임이 아니라면 이익을 보는쪽이 있기 마련이고 상대적인 손실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정부와 금융권은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도록 후속조치를 취해준다는 원칙을 세워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거래당시 조건이 미래의 같은 조건은 될수 없다. 3각 빅딜로 거론되고 있는 업종이 그룹의 미래에 큰 역할을 해낼 수도 있는 업종이라는 점에서그런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그러면 「3각 빅딜」에서 이득을 보는 쪽은 어디고, 손해를 보는쪽은 어딘가.우선 현대의 손익이다. 소문대로라면 현대는 석유화학을 LG에 주고삼성자동차를 넘겨 받게 된다. 재계의 관심은 현대가 내줄 석유화학보다 받아들일 자동차에 쏠려 있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는 현대에별 도움이 안된다. 오히려 짐만 된다는게 현대의 주장이다.삼성은 이제 24만대 생산능력을 갖췄다. 올해 생산목표는 8만대.그러나 여기에 들어간 투자는 무려 3조원이 넘는다. 부채는 2조6천억원에 이른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했지만 삼성의 부산공장이 경쟁력이 없다는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차종도 겹친다. 삼성이 갖고 있는 SM5시리즈는 현대의 쏘나타와 곧선보일 「XG」라는 중대형 승용차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 게다가 삼성차는 독자모델이 아니다. 닛산의 세피로 (수출명 맥시마)를베이스로 한 모델인 까닭에 수출이 자유롭지 않다. IMF 한파로 당분간 내수시장은 접어둔채 수출에 주력해야하는 현대로서는 부담이아닐 수 없다.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산 1백60만대 규모의현대자동차에 26만대를 얹어봤자 1백86만대에 불과하다. 현대가 기아를 먹겠다며 제시한 경제 규모인 2백50만대 수준엔 턱 없이 모자란다.물론 모든게 단점은 아니다. 미래의 경쟁자를 미리 흡수해 시장지배력을 넓힌다는 이점은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삼성 계열사들이사모은 기아자동차 주식을 함께 넘겨주는 조건까지 곁들여진다면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포드를 앞서는 기아의 최대주주가 될수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의 열쇠는 아직 정부의손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포기할 경우 현대가 기아에 계속 관심을 가질지도 의문이다.반면 LG에 내줘야 한다는 석유화학은 아깝기만 하다는게 현대의 입장이다. 석유화학은 언제나 그렇지만 「한탕장사」다. 현대의 대산유화단지는 에틸렌기준으로 국내 최대규모인 1백만t 체제다. 이제막 투자가 끝나 2000년이면 투자회수가 가능하다는게 현대측의 주장이다.그렇게 보면 현대로서는 빅딜이 전혀 내키지 않는다. 현대가 막판에 합의를 틀어버렸다는 소문도 그래서 나오는 것 같다.현대가 아까워하는 석유화학이지만 이 회사를 받아야하는 LG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전남 여천에 기반을 둔 LG화학은 충남 서산에 있는 현대석유화학공장을 받아 봐야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게 이유다. 특히LG는 범용제품 위주의 사업방식을 포기하고 정밀 화학과 의약품 등고부가가치 품목에 주력한다는 방침을 마련해 놓은 상태여서 이번빅딜은 회사의 기본 전략과 큰 차이가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구태여 부채 3조2천억원짜리 현대석유화학을 떠안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그러나 현대와 LG간의 통합이 현실화될 경우 마이너스 효과만 있는것은 아니다. 현대를 넘겨받으면 단번에 1백63만t 체제를 갖추게된다. 이미 세계 1백위권으로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는 LG는 나프타분해시설(NCC)등 기초 화학부문과 정밀화학, 의약부문 등을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화학기업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LG가 빅딜에 마지막까지 버텼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삼성에 줘야하는 반도체 때문이다. 특정 사업부문의 사업성은 장기적인 시각에서판단돼야 하는 것이며 반도체의 사업성은 여전히 높다는게 LG의 주장이다. 10조원의 투자가 들어간 반도체를 쉽게 포기하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생산성은 뛰어나지만 설계 능력이 경쟁사에비해 취약해 거액의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LG반도체가인텔등 외국사로부터 외자 유치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도 이런배경에서 나온 것이다.따라서 LG로서는 빅딜이 죽도록 싫은 정도는 아닌 것으로 분석된다.삼성은 자동차를 떼내고 LG반도체를 받게 된다. 삼성 역시 LG반도체를 합쳐봐야 반도체 제조기술과 설계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기술이 다르기때문에 라인의 공정도 서로 틀 려 삼성전자가 인수하더라도 사실상2개 기업이 계속 존속하는 꼴이 된다는 설명이다.◆ 삼성, ‘명예 퇴직하고 퇴직금 받자’그러나 시장 지배력이 높아진다는 장점을 무시할 수 없다. 세계 메모리시장에서 가격과 공급면에서 확실한 선도기업이 될 가능성이높다. 현재 삼성은 세계시장의 18.8%를 점유하고 있고 LG의 셰어는6.7%. 둘을 합치면 25%가 넘는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결코 나쁜조건은 아니다.자동차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 아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기아자동차를 인수하지 못한다면 삼성의 자동차사업은 형극의 길이 될 것이다. 현재로선 삼성이 기아를 인수할 가능성도 높지 않다. 따라서삼성그룹 내부에서도 「명예퇴직」 하면서 「퇴직금」을 챙겨보자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재계의 반발로 수면 밑으로 숨어들어간빅딜론을 다시 끄집어낸게 삼성이라는 소문은 이래서 나도는 것이다. 어쨌든 삼성으로선 자동차에 미련만 없으면 「3각 빅딜」이 나쁘지 않다는 얘기다.「3각 빅딜」의 손익계산서는 그룹마다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다.당장은 서슬이 퍼런 금융당국의 압력에 밀려 성사된다해도 후유증은 남기 마련이다. 오히려 80년대초 중화학투자조정 조치가 남긴부작용보다 더 큰 것이 될수도 있다.물론 구조조정이 원칙적으로 민간자율에 맡겨야하는게 원칙이라지만 정부개입이 불가피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러나 3대그룹에 대해 한업종씩 주고받는 형식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경제성이 없는 공급과잉업종의 비교열위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를교환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꼭 산업경쟁력에 이로운지도 검증돼 있지 않다. 시장경제의 틀을 깨는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빅딜을 밀어붙이기에 앞서 구조조정의 목적과 본질을 보다 분명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