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지금 부실은행 정리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있다.종전에도 은행합병 얘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몇개 은행이 한꺼번에 문을 닫는다는 것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충격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점은이와 같은 부실금융기관 정리과정에서 소위 금융공황과 같이 금융시스템 전체가 마비되는 대혼란이 발생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재의 금융구조조정이 정부의 사전계획과 통제하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소위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resort)로서 금융제도 전반을 떠받치는 버팀목의 역할을 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역할은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된역사적 산물인 동시에 월터 배지엇이라는 탁월한 영국인의 노력에크게 힘입은 것이다.나폴레옹 전쟁 직후 영란은행이 금태환을 재개한 이후에도 영국경제가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거의 10년 주기로 경기변동과 금융공황을 경험하게 됨에 따라 금태환 재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고, 이에 따라 경기변동 및 금융공황의 원인규명과 치유책 발견을 위한 노력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금융이론도 크게 발전했다. 특히 통화학파와 은행학파간의 논쟁은 당시의 지식인을 사로잡았던 대논쟁이었으며 사회적인 영향력도 대단했다.그 결과 당시 주류를 이루던 통화학파의 견해, 즉 주기적인 금융공황은 은행권의 남발이 그 원인이므로 금융공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제한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1844년 필 은행법이 제정됐고, 이에 따라 은행권 남발 의혹을 받아온 영란은행은 은행권을 발행하는 발권부문과 일반 상업은행의 업무를 담당하는 영업부문으로 엄격히 분리됨으로써 재량적인 유동성 공급을 할수 없도록 제도화됐다. 그러나 얼마후 당시 예상과는 달리 금융공황이 재발함으로써 이러한 제도 또한 그 타당성을 의심받게 됐다.이때 필 은행법의 모순을 지적하고 금융위기시 영란은행이 취해야할 태도를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게 해명한 사람이 바로 배지엇이었다. 가업을 이어 받아 잠시 은행을 경영한 경험이 있고 세계적 권위의 경제주간지인「이코노미스트」지의 2대 발행인을 역임한 그는현실적으로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영란은행이 명시적으로 최종 대부자의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금융공황의 조짐이 보이면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최대한줄여 연쇄도산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영란은행이 충분히 대출을 늘리되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 동 대출에는 고금리를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한편 금융공황에 대응하여 중앙은행이 대출을 늘림에 있어 지켜야할 몇가지 구체적인 원칙도 제시했다. 우선 개별금융기관이 아니라금융시장 전체를 위해 유동성을 공급할 것, 지급능력은 있되 일시적으로 유동성 부족에 빠진 은행만 지원하고 부실은행은 지원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부실은행의 자연스러운 퇴출을 유도할 것, 영란은행 대출에 대해서는 벌칙성의 고금리를 부과할 것, 그리고 이와같은 자금지원원칙을 사전에 고시할 것 등이 그것이다.재야의 재무장관으로 불리기도 한 그는 재정증권을 창안함으로써오늘날 중앙은행의 주요정책수단인 공개시장조작의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다.배지엇의 최종 대부자에 대한 아이디어는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곧주변국들로 전파됐다. 특히 미 대통령 윌슨이 연방준비제도 설립을주도하는데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로 미루어 그는 현대적 의미의 중앙은행제도의 창안자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금본위제도가 폐지된지 오래고 금융시장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발전한 오늘날에도 배지엇이 주장한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기능과이를 수행함에 있어 지켜야 할 당초 제시한 원칙들은 중앙은행이금융제도 전체의 안정을 지키는 수호자의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