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유럽에서는 금세기 최대의 실험인 유러화 단일통화통합이 가시적으로 추진되고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외환위기라는, 발등에 떨어진 불 때문에 유러화탄생의 의미를 제대로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동아시아에서는 유러화체제의 출범을 두고 경제적인 관점에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나의 통화권으로 통합되면3백억마르크에 달하는 환거래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이종통화거래에 따른 환위험 이자율위험이 없어지므로 유럽내 자본활동이 개선된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는 이들은 유러화가강력한 국제통화로 부상하는데 따른 이익에도 주목하고 있다. 유러화체제가 전면 가동되는 2002년이 되면 현재 달러화가 누리고 있는국제준비통화 혹은 국제결제통화로서의 지위에 큰 변화가 발생할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유러화는 달러시장을 최소 5천억달러에서 1조달러 정도 잠식할 것이며,무기 마약 매춘등 현금결제만이 가능한 각종 밀거래에서도 달러시장을 파고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미국의 국가전략 싱크탱크인 국제경제연구소의 프레드 버그스텐소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유러화체제의 출범은 지난 45년간 유럽이 축적해온 경제적 통화의 종착점이요,나아가서는 유럽의 패권지향을 의미하는 정치적 통합의 출발점이다』경제적 실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대한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유러화체제는 지금까지 팍스아메리카나의 구도하에서 단일패권의 지위를 누려온 달러화에 대한명백한 통화전쟁의 선전포고이며,유럽이 나토의 핵우산에서 벗어나독자적인 외교 안보 군사노선을 채택할 것이라는 신호탄이다.최근 동아시아의 금융위기에서 볼수 있듯이 미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위기의 배후에 미국의 「음모」가 작용했건 안했건간에 미국은 달러를 베이스로 움직이는 국제투기자본의 광폭성을 통해 새로운 영향력의 지렛대를 확보했다. 유럽도 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수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영란은행은 지난92년 조지 소로스가 진두지휘한 헤지펀드의 공세에 패퇴했고 이어서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도 무릎을 꿇었다. 유럽 각국은 달러자본의 공격성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게됐다. 이것이야말로 유러화통합을 이끌어낸, 결코 무시할 수 없는동인이다.유러화의 장래를 어둡게보는 시각도 있긴 하다. 하버드대학의 마틴펠드스타인 교수는 『독일 네덜란드등 북유럽국가들은 인플레없는경제와 강력한 유러화를 지향하는 반면에 프랑스 스페인등 남유럽국가들은 고용창출 경제성장을 선호하므로 통화 환율정책을 놓고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사실 지난 5월초 유럽정상회담에서 초대 유럽중앙은행 총재를 놓고 독일과 프랑스가치열하게 격돌했던 것은 이의 전조가 아닐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유러화체제의 결속가능성은 높다고 봐야한다. 북미경제권과 달러화의 공세가 강력할수록,아시아의 경제회생이 가시화될수록 유럽은 결속외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개방과 블록화라는 이중적 세계경제구조는 유럽의 내부갈등을무마하는 요인이 되기에 충분하다.그렇다면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는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것인가. 당면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제각기국제통화기금(IMF)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고 상호간에 평가절하경쟁, 출혈경쟁을 불사하면서 수출에 박차를 가하면 되는 것일까.각국의 단독플레이로 인해서 동아시아 공멸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은 아닐까.동아시아 제국은 이번 위기를 계기로 상호간에 강력한 금융외교채널을 구축해야 한다. 유럽의 통화통합이 60년대말부터 30여년에 걸친 노력의 결실임을 인식하고 지금부터라도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한다. 유럽이 동질성을 갖고 있다면 동아시아도 그에 버금가는 동질성을 갖고 있다. 미국과 IMF의 우등생이 되기를 꿈꾸는 우리의위정자들은 유러화 통합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