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개혁의 기폭제가 터졌다. 그동안 말많던 빅딜(사업맞교환)이 이뤄진 것도 아니고 새로운 퇴출기업명단이 발표된 것도 아니다. 바로 부실기업으로 이어지는 은밀한 돈줄을 끊어버리는 「부당내부거래 근절」이라는 폭탄이다.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9일 현대 삼성 대우 LGSK 등 5대그룹의 부당내부거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모두7백22억원의 과징금을 이들에게 물렸다.이들 그룹의 80개사가 지난해 3월부터 올 4월까지 부실한 35개 계열사에 4조2백63억원을 부당하게 자금지원한데 따른 것이다. 재벌들은 부도 직전의 기업어음을 고가로 사주거나 부동산 매각대금을받지 않는 등 다양한 수법으로 부당내부거래를 해 부실계열사를 살려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관행처럼 여겨지던 재벌들의 내부거래가 이번에 철퇴를 맞은 것이다. 이번 부당내부거래 조사 의미는단순히 관행을 바로잡자는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재벌개혁의 신호탄이라고 봐야한다.◆ 한계기업 돈줄 끊겨 도태될듯그간 정부는 기업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 빅딜과 IMF의 고금리정책을 처방으로 들고 나왔다. 그러나 빅딜은 재벌들간 입장차이에따라 실현 가능성 여부가 불확실해지면서 아직 별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고 있다. 고금리정책도 5대 그룹에는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오히려 5대 그룹에 시중자금이 몰려 이들 그룹의 부실계열사 퇴출은 사실상 물 건너가버린 형국이었다. 몇몇 금융기관이 문을 닫고거리에는 실직자가 넘치는데 정작 경제회복의 선두에 서야할 5대그룹에선 별다른 구조조정안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더욱이 재계는 올들어 전경련을 사실상 김우중회장 직할체제로 재편하면서 정부에 「더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강경노선을 견지하고있다.따라서 자율적인 구조조정을 기다리는데 지친 정부로서는 재벌개혁의 고삐를 바짝 당기기 위한 새로운 정책수단이 필요했던 셈이다.공정거래법을 적용해 시장경제에 맞게 부당내부거래 근절이란 칼을휘두른 것은 이래서다.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은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우량기업의 에너지가 부실기업으로 흘러들어가 결과적으로는 그룹 전체 경쟁력이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며 『앞으로 지속적인 조사로 부당내부거래를 뿌리 뽑겠다』고 말했다.이는 각 재벌들로 하여금 중복투자나 손해보는 사업은 정리하고 핵심기업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하라는 정부주문과 일맥상통한다.한계기업을 자연히 퇴출시키고 기업 역량을 핵심기업에 집중시키는방식으로 재벌개혁을 가속화하겠다는 뜻이다.공정위는 지원받은 부실계열사에 대한 자료를 금융감독위원회에 넘겨 퇴출기업판정자료로 활용하겠다는 방침도 이미 수차례 밝힌바있다.이같은 강력한 정부입장에 따라 앞으로 오너의 지시에 따른 선단식경영을 해온 재벌들도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다. 계열사의 도움으로간신히 연명해 온 한계기업들은 사실상 생존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정부가 강제 퇴출시키지 않아도 그룹내 온정주의적 돈줄이 모두 끊기면 자연히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더욱이 정부는 기업구조조정 압박을 위해 부당내부거래 차단과 함께 금융권의 여신한도 축소라는 채찍도 사용하고 있다. 금감위가은행·투신사의 신탁계정에서 동일그룹 기업어음을 5%까지만 보유토록 한 것도 그 하나다.또 IMF와의 합의로 2000년부터는 은행과 종금사가 동일그룹에 빌려줄 수 있는 총액한도도 대폭 줄어든다. 결국 재벌들은 싫든 좋든내부거래로 부실계열사를 살리는 것을 중단하고 과감히 퇴출시켜부채비율을 2백%로 줄여야할 상황이다. 부당내부거래 조사가 사실상 가장 강력한 재벌개혁의 수단이라는 평가도 이래서 나온다.◆ 정부강압이냐, 기업자율이냐 정면대치재벌들이 이에 대해 즉각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이런 속내가 담긴 것을 모를리 없기 때문이다. 김우중 전경련회장대행은31일 관훈클럽 조찬간담회에서 『공정위 조사 결과는 무리한 내용이 많아 어느 그룹이더라도 재심요청과 행정소송을 해야 한다』고말했다.또 『대우의 경우 공정위가 지적한 사항은 결코 부당내부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과징금을 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재벌의 반발은 과징금에 대한 자금부담 때문만은 아니다. 구조조정의 주도권을 정부에게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얘기다.현재 5대 그룹에 대해 부당내부거래 2차조사가 실시되고 있고 연내에 6~30대 그룹도 조사대상에 포함된다.여기서 한번 밀리면 재계가 말하는 「오랜 관행」은 발붙일 곳을잃게 된다. 「한국적 기업문화」도 「미국식」으로 재탄생해야 하는 막바지 벼랑에 몰리게 된다. 피붙이처럼 여기던 일부 계열사가강제 퇴출당하는 꼴을 지켜봐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결국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한 정·재계간 갈등은 기업구조조정의 수위와 속도를 놓고 양자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구도로 볼수 있다. 공정위는 관행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내부거래의 부당성을입증해 근절시키고자 할 것이다.이를 통해 재벌들에 부실기업 퇴출과 중복사업의 빅딜이라는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강요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조사를 계기로 재벌개혁은 「피해갈 수 없는 일」로 보고있다. 정리해고 문제를 놓고 노동계와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을 설득하려면 뭔가 가시적인 기업구조조정을 달성해야하기 때문이다.반면 재계는 관행과 IMF이후의 급격한 신용경색과 금리상승 등을들어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역설하고 있다. 정리해고 문제는 최근김우중회장이 밝혔듯이 임금구조의 재조정을 통해 해고를 최소화할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빅딜이나 부실계열사 퇴출은 시장상황에 맞게 기업자율에 맡겨달라는 입장을 내비치면서 말이다. 재벌의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밀고밀리는 공정위와 재계간 줄다리기가 어떤 식으로 판가름날지 주목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