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사태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러나 최소한 미국이 우리에게 있어 더 이상 「아름다운 나라, 美國」이 아니라는 시대전환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된다.IMF를 내세워 그간의 모든 불만사항을 해결하려 한 미국, 말로만 혈맹일 뿐 정작 구제금융 지원에서는 자신의 뒷마당인 멕시코나 브라질에 비해 현격하게 차별한 미국, 98년이 금융위기의 해였다면 99년은 통상 위기의 해가 될 것이라며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를 가로막는 미국. 이것은 한미관계의 변화된 현주소이고 우리로 하여금 아시아 연대에 눈뜨게 한 중요한 계기임에 틀림없다.그간 우리는 철저히 아시아를 외면해왔다. 우리사회의 소프트웨어를 들여다 보면 빼다박은듯 일본을 모방했지만 「일본은 없다」며 그 실체를 부정했고, 덩치는 인정하지만 무엇하나 배울 것이 없다며 중국을 내심 매도해 온 우리의 이중성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아시아 공조는 우리가 풀어야 할 최우선의 과제로 다가왔다. 외환금융 위기의 극복만해도 구조조정만으로는 결코 충분할 수 없다. 엔화와 위안화의 환율이 현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우호적 외부조건이야말로 위기극복의 절대 과제이다. 또한 미국의 장기버블이 언젠가 파열하여 장기불황에 빠져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우리는 아시아를 끌어안고 서로를 위한 완충의 시장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아시아연대에 있어 한국의 역할은 실로 막중하다. 실력만큼 대외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면 중국과 일본도 서로를 옥죄는 불신의 고리를 끊어야 하며, 이때 중간자의 역할은 한국의 몫일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은 미국의 전쟁수행비용을 도맡아 대고 있지만 UN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고, 러시아도 업저버로 참여하는 G7회의에 중국이 빠져 있다. 더욱 한심하게는 전세계에서 유독 중국 일본 한국만이 지역경제권을 형성하지 않고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이미 달러의 광폭성은 백일하에 드러났고 아시아는 적어도 중국의 위안화가 국제통화로 실력을 키우기까지는 일본의 엔화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엔블록화는 이미 1단계의 수순을 밟고 있다. 지난해 8월 아시아의 중앙은행장들이 만나 국채환매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시아 각국이 평소 외환보유고의 일정 부분을 일본 국채로 운영하다가 유사시에는 이를 일본 중앙은행에 빌려주는 대신 급전을 얻어 외환위기를 진화시킨다는 구도이다. 따라서 AMF창설 논의는 엔화의 역내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당분간 인정하되 일본이 아시아경제를 좌지우지 못하도록 적절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문제, 그리고 수평적 분업 확대와 내수시장 진작 등 일본이 공헌해야 할 과제를 집중적으로 부각해야 한다.유럽통합은 견원지간인 독일과 프랑스를 양대축으로 추진되어 왔다. 전쟁 재발의 방지를 위해서는 견제보다는 상호간의 협력체계가 필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미국의 위압적 무게를 혼자 힘으로 짊어질 수 없다는 현실론이 그 발로가 되었다. 이때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점은 독일과 프랑스간에 베네룩스라는 중간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벨기에는 EU의 본거지를 제공했고, 네덜란드는 유럽중앙은행의 초대총재직을 맡았다.냉전체제 종식이후 전횡의 도를 더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견제는 아시아 공조만으로 가능하며, 이때 한국은 베네룩스의 역할을 맡아 수행해야 한다. 말끝마다 아태강국이니 동북아 중심국가니 하는 포장형의 국가 이념을 내세우지 말고 이제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강점을 살려 중심국가로서 자리매김함으로써 「작지만 실속있는 나라」를 구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