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노량해전도 그리기 위해 난중일기 수십번 독파

최근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에 칼과 쇠말뚝이 꽂힌 것이 발견돼 한 차례 화제가 됐다. 곤욕스런 일로 충무공의 이름을 거론하게 돼 민망하기 이를데 없는데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됐는지를 생각하면 할 말을 잊게 된다. 충무공이 어떤 분인가. 4백년전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분이 아닌가. 그러나 돌아보면 과연 우리는 그 분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의외로 충무공을 잘 모르고 지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기는 서양화가 김한오씨(50)도 마찬가지다. 지난해말 국방부로부터 충무공의 노량해전도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그는 조금 망설였다. 노량해전도와 같이 역사를 근거로 하는 그림을 그릴 때는 사실성이 생명이다. 그런데 과연 충무공과 그의 마지막 전투이자 그가 숨을 거둔 싸움이기도한 노량대첩에 대해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 생각하니 막막했다는 것이다.김씨는 『우리나라에도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한 정확한 기록화가 있어야 겠다는 생각과 충무공의 정신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고 밝힌다. 노량해전도를 그리기 위해 그는 <난중일기 designtimesp=18395>를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특히 노량대첩과 관련한 부분은 수십번도 더 읽었다. 역사적인 사실에 어긋남이 없이 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난해에는 4백년전 노량대첩이 일어났던 날인 11월 18일, 전투가 시작된 그 시각에 노량 앞 바다를 찾았다. 『전쟁이 있었던 바로 그 날, 그 시각에 그 현장에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그는 말한다.『11월 18일 전투가 시작된 밤부터 전투가 끝난 다음날 새벽 4∼5시까지 노량 앞바다에서 서성거렸습니다. 한마디로 칠흑같은 어둠이더군요. 그 곳에서 나였다면 군대를 어떻게 지휘했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이런 지형에서는 배를 어떻게 배치했을까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노량대첩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 싸움에서 우리나라가 이겼다는 것은 기적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보잘 것 없는 배와 무기로, 그렇게 적은 군사로 싸워 승리를 거뒀다는 것은 충무공의 전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그는 그림에 들어가는 배와 병기, 군사들의 복장도 역사적 사실에 맞게 표현하기 위해 육군 사관학교와 해군 사관학교의 박물관장을 찾아가 일일이 고증을 받았다. 화살촉 하나, 병사들 옷자락 하나에도 「사실성」을 불어넣으려 노력했다. 외부 손님이 자주 찾는 국방부 회의실 입구에 걸릴 그림이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완벽을 기했던 그림은 이 충무공 순국 4백주년이었던 지난해말에 완성됐다.『노량해전도와 같은 기록화를 한번 그리고 나니 우리나라의 많은 기록화들이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림 하나의 힘도 적지 않을텐데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김씨는 충무공 그림을 그리며 백의종군의 교훈도 얻었다. 대의를 위해 군대의 수장이 일개 졸병으로 참전할 수 있는 그 용기와 마음가짐, 겸손을 절절히 느끼게 됐다는 것. 『백의종군하는 마음이란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꼈고 그럼 나는 화가로서 어떻게 백의종군하는 마음을 가질 것인가를 반성하게 됐다』는 설명이다.김씨는 73년 홍익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교육대학원에 입학, 미술교육을 전공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겠노라고 결심했기에 진로를 선택하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집안에서도 큰 반대는 없었다. 단지 고등학교 때 그림 연습을 하느라 집에 가져다 놓은 석고상을 할아버지가 모조리 깨버린 사건이 있었다. 할머니가 달빛에 비친 석고상을 보고 귀신인줄 알고 놀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의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학교에서 빌려온 석고상도 함께 깨버렸기 때문에 한동안 꽤 곤란했었던 기억이 난다』고 그는 회상한다.김씨는 구상화가다. 형체가 있는 것을 그린다는 의미다. 구체적인 사물이나 풍경을 보고 사실적으로 그리기도 하지만 여기에 상상을 가미하기도 한다. 김씨가 좋아하는 소재는 사람들이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래서 어부들이 배에서 잡은 물고기를 나르는 모습이나 시장에서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모습을 좋아한다. 「아, 살아 있구나」하는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그림에 담고 싶어한다. 최근에는 풍물놀이와 같이 기원이 담긴 우리나라의 전통놀이에 관심이 많다. 살아 있음에서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기원을 그림에 담고 싶은 욕심에서다.화가하면 배고픈 직업이라는 생각부터 드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먹고 살만하다』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림이 잘 팔리는, 잘 나가는 화가는 아니지만 개인전을 4번 열었고 입상 경력이 많은데다 여러 차례 초대전도 가졌기 때문에 자리를 잡았다는 설명이다. 그래도 그림 그리는 것만으로는 생활이 안정적이지는 못해 동아문화센터와 MBC문화센터에 출강, 서양화를 가르치고 있다.그는 『소원이야 먹고 살 걱정 안하고 그림만 그리는 것이지만 세상이 다 하고 싶은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하다』고 말한다. 김씨는 예술가, 특히 화가란 완전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여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다 그는 결벽증까지 있다. 물질적인 더러움에 대한 결벽증이 아니라 정신적인 결벽증이다. 예를 들어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돈은 빌려줘도 아주 작은 돈이라도 남한테 빌리지는 못한다. 『상대방이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주게 될 때 느끼는 인간 본연의 망설임과 거리낌이 싫어서』라는 설명이다. 그의 결벽증은 『진실되게 거짓없이 살자는게 내 생활 신조고 또 그래야 좋은 그림, 깨끗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화가란 어차피 세상 속에 사는 구도자가 돼야 하기에 가능하면 『고고하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게 살려고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