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를 이끄는 기업가들의 꿈은 한결같다. 자신의 회사가 만든 제품이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매출은 쑥쑥 커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 상황을 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기업가들의 머릿 속에서는 판매경쟁과 자금걱정이 한시도 떠날 날이 없기 때문이다.일본에서도 고산지대로 소문난 나가노현의 한천(寒天)제조업체인 ‘이나(伊那)식품공업’을 꾸려가고 있는 쓰카오 히로시(64)사장. 그는 기업, 그리고 기업인에 대한 외부의 선입견과 관념을 걷어차버린 초상식의 경영으로 일본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단자다.쓰카오 히로시 사장.필요한 제품만 공급 … 신제품개발 전력투구쓰카오사장의 트레이드마크로 부각된 초상식경영의 핵심은 한마디로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주문이 폭주한다고 무턱대고 생산량을 늘리지 않는다. 시장이 꼭 필요로 하는 제품만 공급한다. 소비자들이 등 돌릴 날을 대비해 신제품 개발에 전력투구한다.”이나식품이 연간매출 1백8억엔(2000년)에 불과한 시골 중소기업이면서도 일본 재계와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배경에는 쓰카오 사장의 옹고집 같은 괴짜철학이 깔려 있다.우뭇가사리에서 추출한 우무를 얼려서 만드는 한천은 일반 소비자들에게 낯익은 상품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상품도 아니어서 판로도 넓지 않다. 옥외에서 자연동결시켜서 만든 천연한천과 동결과정을 거치지 않고 인공적으로 제조한 공업용 한천이 있지만 소비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거나 먹을 기회는 많지 않다. 양갱, 음료 등 일부 가공식품과 의약품 원료 등으로 사용되지만 기본적으로 수요가 많다고 보기 어렵다.그런데도 쓰카오 사장은 시장에서 물건을 달라는 주문이 몰려들 때 회사가 단번에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기회를 외면했다. 그리고 외길을 묵묵히 걸으며 본업과 관련된 기술 및 제품 개발과 회사를 내실있게 키우는데만 심혈을 쏟았다.나가노현에서도 혹한지역으로 손꼽히는 이나는 우무를 동결건조시키는데 최적의 기후조건을 갖춘 고장으로 평가받아 왔다. 자연 한천제조는 이 지방 고유의 향토산업으로 4백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제조업체는 거의 자영 영세업체에 불과했다. 생산업체의 규모가 영세하다 보니 품질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겨울철 날씨 변화에 따라 품질이 크게 차이가 나고 가격은 널뛰기처럼 변화가 들쭉날쭉했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한천에다 ‘투기상품’이라는 불명예를 붙여 주었다.이나식품의 경영환경도 다를 바 없었다. 쓰카오 사장은 은행관리하에 있던 이나식품의 전신 이나화학으로 파견나올 때인 1958년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신용도 물론 없었지요. 있는 것이라곤 직원들 뿐이더군요. 한천제조업은 그야말로 벼랑에 몰려 있었습니다.”21세의 어린 나이로 구멍가게나 다름없던 업체의 사장을 맡은 그는 위기를 절감했다.하지만 회사와 함께 향토산업인 한천제조를 살려내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다졌다.쓰카오 사장은 우선 한천의 품질과 가격안정을 위한 기술개발에 눈을 돌렸다. 당시 막대기 형태로 생산하던 한천은 녹지 않으면 사용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이물질이 들어간 불량품이 많다는 고객들의 비판을 감안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식 양갱 만드는데만 한정돼 왔던 한천의 용도를 새로 찾아내는 노력도 함께 병행했다. 스낵, 비스킷 등 서양식 과자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현실을 무시하고 일본식 과자에만 한천을 사용하는 것을 고집한다면 곧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에서였다.쓰카오 사장은 막대기형 한천을 분말로 만드는데 착안했다. 옥외가 아닌 실내공장에서 냉동, 압착탈수 과정을 거쳐 만들 수 있다면 계절에 관계없이 한천을 생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이렇게만 된다면 안정된 품질의 제품을 사계절 내내 만들어내면서 값도 적절하게 받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생산 설비를 갖춘 후 그는 원료의 안정 확보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세계 30여개국으로 거래선을 늘려 자칫 제품 수요가 늘어날 때도 원료가 없어 공장을 돌리지 못하는 일이 없게끔 준비작업을 해놓았다. 연구인력들에게는 성질이 각기 다른 각국의 우뭇가사리를 섞어 한천을 만들더라도 품질에는 이상이 없도록 개발작업을 철저히 하라는 지시를 내려 놓았다.앞을 내다본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분말로 만든 한천은 가격, 판로의 안정과 함께 신제품 개발에도 촉매가 돼 주었다. 분말 한천은 자연 한천과 달리 별도의 젤(Gell)화제를 섞으면 새로운 형상을 가진 한천이 만들어지는 등 신제품이 속속 탄생했다. 시장에서는 이나식품의 인기가 치솟고 거래처들의 시선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그러나 쓰카오 사장 특유의 고집과 소신이 본격적으로 경쟁사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81년의 일이었다. 당시 이나식품이 일반가정을 겨냥해 내놓은 젤리원료 ‘컵젤리-80도씨’는 나가노현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조금씩 한정 판매하던 상품이었다. 그렇지만 가정에서도 쉽게 젤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제품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삽시간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형 슈퍼마켓에서는 구매담당자들이 돈을 싸들고 몰려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날마다 주문이 산더미처럼 몰려 왔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고 거금을 거머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그러나 쓰카오 사장은 단호히 거부했다.“이나식품은 어디까지나 중간원료 메이커입니다. 가정용 제품을 만들다보면 한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수급균형이 깨지고 말지요. 그리고 가정용 신제품 개발에 매달리면 본업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막대기형 한천 분말로 만들어 대히트기존 거래선들에 대한 제품공급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이는 신용을 어기는 것이며 장래가 불확실한 제품을 위해 무턱대고 생산라인을 늘리지 않겠다는 소신이었다. 작은 회사의 사장이지만 기본을 우직하게 지키면서 정도를 걷겠다는 외길정신이었다.이나식품은 일본 업무용 한천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을 정도로 독보적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회사 외형은 크지 않아도 58년 이후 43년간 단 한번도 매출 수익에서 뒷걸음질쳐본 적이 없다. 개발을 어떤 업무보다 중시하는 쓰카오 사장의 영향을 받아 전직원의 10%가 연구개발인력으로 채워져 있다. 회사 경영이념에도 이같은 비전과 정신은 강하게 담겨 있다.이 회사의 사시는 “첫째, 우리는 다른 회사가 만들지 못하는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다”로 출발한다. 업무용과 가정용의 판매 비율이 6대4 정도로 엇비슷하지만 특히 업무용 한천 시장에서는 ‘메이드 인 재팬’의 대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나식품의 제품은 이제 젤리, 해초샐러드 등을 중심으로 가정용에서만 1천여종을 헤아리고 있다. 한천 필터 그리고 DNA 감정용으로 쓰이는 ‘아가로스’를 한천에서 만들어내는 것도 이나식품의 몫이다. 아가로스는 미국을 중심으로 구미 선진국 시장에도 수출돼 일본 한천메이커들의 자존심을 높여주고 있다. 이나식품은 또 한천에 함유된 아가올리고당이 항암에도 좋은 효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지방중소기업의 경영자지만 쓰카오 사장은 직원들의 눈과 귀를 깨워주는 일만큼은 대그룹 총수 못지않은 혜안과 넉넉함을 지녔다. 이나식품은 73년부터 일찌감치 2년에 한번씩 전직원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실시해 오고 있다. 또 98년부터는 경상이익이 전년보다 5% 이상 늘어났을 경우 3분의 1을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시골 구석에서 한천 하나에만 매달려 온 정성을 쏟고 있는 직원들에게 ‘해보자’며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