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분명 기회의 땅이다.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 등 민감한 외교현안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일본은 ‘못믿을 정치소국’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경제대국의 그림자가 한국인들 옆에 우뚝 서 있다.세계 각국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곳간을 가득 채워 놓은 일본은 경제적 측면으로만 본다면 한국의 도약대이자 잠재적 황금 시장이다. 뿌리 내리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끈질기게 파고 들면 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게 상당수 재일 한국인들의 지적이다. 단적으로 말해 돈값부터 다르다. 한국 원화는 일본에서 가치가 11분의1로 오그라들지만 반대로 한국으로 가져간 엔화는 11배로 껑충 뛴다. 일본인들의 차별과 무시에 속이 상한다면서도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 땅에서 죽어라 땀흘리고 일하는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도쿄의 신오쿠보역. 고 이수현씨가 철도 사고를 당한 곳이다.하지만 한국인이 일본 땅에 뿌리를 박기란 정말 어렵다. 수많은 한국인이 경제적 성공을 꿈꾸며 ‘재팬 드림’에 도전하지만 일본인들의 배타적 민족성과 폐쇄적 사회시스템은 낯선 외국인의 진입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같은 한국인들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일본인에 비해 경제적 약자인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섣불리 남을 믿고 도와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재일 한인사회에서 ‘한국인이 가장 의지하기 쉬우면서도 한편으로 못믿을 사람은 같은 한국인’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이 도는 것은 이런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이렇게 볼 때 재일 한인사회에서 본격화된 최근의 움직임은 한국인들의 위상 및 경제적 지위 변화 가능성을 저울질할 새로운 실험모델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핵심에는 재일교포 1, 2세가 중심이 된 기존의 민단과 달리 또 하나의 대규모 한국인 민간단체를 출범시킨 작업이 자리잡고 있다.도쿄 일대 17만여 ‘뉴 커머’ 권익 보호 앞장주일 한국대사관과 재일 한인사회에 따르면 도쿄 일대에는 줄잡아 17만여명의 ‘신한국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징용, 징병 등의 이유로 일본 땅에 강제로 끌려와 살게 된 재일교포와 그 후손들이 아니다. 한일협정체결 이후 유학, 사업 등 이런 저런 이유로 일본에 건너와 정착하게 된 사람이 절대다수다. 자연 이들은 사고, 생활방식과 하는 일들이 재일교포와 다르다. 재일교포들이 일본인의 차별과 멸시 속에서 설움을 참아가며 파칭코, 야키니쿠(불고기), 건설, 부동산업 등을 통해 기반을 다진 것과 달리 신한국인들은 요식업 식품점 여행사 미용실 등 또 다른 틈새비즈니스로 일본 사회를 파고 들고 있다. 재일 교포 상당수의 생업이 ‘완료형’인데 반해 신한국인들의 재팬 드림은 ‘진행형’이 많은 것 또한 두 그룹을 갈라 놓는 차이중 하나다. 재일 교포사회가 일본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신한국인들의 내부세계는 한국사회 축소판을 연상시킨다. 신한국인 사회에는 돈벌이가 되는 비즈니스라면 서울에 있는 것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들어 있다.위상제고 구심적 역할 기대뉴 커머(New Comer)로 불리는 이들 재일 한인사회의 신한국인을 하나로 묶는 작업의 핵심그룹은 단연 도쿄 신주쿠 일대에 기반을 둔 중소 사업가들이다. 이들은 2000년1월부터 뉴커머들을 대표하면서 권리보호와 권익신장에 앞장설 단일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설립작업에 박차를 가해왔다. 수십명의 발기인이 2000년12월 첫모임을 가진데 이어 지난 1월에는 재일본 한국인연합회를 만들기로 정식합의하고 추진위원회(위원장 김희석)를 결성했다. 위원회(사무국·도쿄 5287-2671)는 20일 연합회 창립총회를 갖고 힘찬 첫걸음을 내딛었다.연합회는 활동방향의 초점을 상부상조와 권익보호, 그리고 일본내에서의 위상제고 및 이미지 개선 등에 1차적으로 맞춰 놓고 있다. 낯선 땅에 와 악전 고투하는 한국인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것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만18세 이상의 재일거주자는 누구나 한 울타리에 끌어안는다는 방침이다. 사업 유학 결혼 등 이유는 각기 달라도 일본 거주자격을 가진 신한국인은 한데 모여 공동체를 구축하고 재일 한인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위상제고에 앞장설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재일 한인사회에서 연합회의 향후 활동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은 설립을 주도한 멤버들의 컬러와 지역적 특성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추진위원회의 멤버 98명은 거의 신한국인 밀집지역인 신주쿠구의 오쿠보 일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인물들이다. 오쿠보는 일본에 정착하는 신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찾는 지역중 하나며 지난 1월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고 이수현씨가 철도사고를 당한 신오쿠보역도 이 곳에 있다.한국인 밀집지역이 되다 보니 오쿠보에는 한국인들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업종과 상점 등 모든 것이 다 들어서 있다. 음식점, 미용실은 물론 병원, 전화대리점에서 약국, 점술집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에 가지 않아도 오쿠보에만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퍼져 있을 정도다.추진위원회의 부위원장겸 사무국장 일을 맡고 있는 조옥제 뉴 크리에이티브 사장은 “오쿠보 일대의 한국계 상점이 줄잡아 1천개는 될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한국인 뉴커머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한국사회를 빼다 박은 듯이 거리 풍경과 분위기가 바뀌자 부작용도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적 정취를 느끼기 어렵다며 오쿠보를 등지는 사람들이 최근 수년간 부쩍 늘어났다. 한국인들이 몰려 살면서 절도, 사기 등 각종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일본 매스컴에서는 ‘오쿠보’라는 지명에 어느새 어둡고 부정적 이미지를 붙여 놓았다.연합회 탄생은 일본 매스컴과 일본 사회로부터 부정적 시선을 받아온 지역에서 재일 한인사회를 대표할 단체가 당당하게 태어났음을 알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설립 주역이 한일 수교 후 일본 땅에서 새롭게 뿌리 내린 중장년 세대라는 점에서 연합회는 민단과 함께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또 다른 축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젊음과 몸 하나를 밑천으로 재팬 드림을 실현시킨 중소 사업가들이 상부상조와 지역 사회 공헌, 그리고 한일교류 활성화에 앞장 설 것을 표방했다는 점 역시 향후 활동을 주목하게 만드는 요소다.연합회 출범의 산파역을 맡은 조옥제 사장은 “일본 사회의 뉴 커머들은 오래 전부터 구심점 역할을 할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해 왔다”며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던 게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연합회 설립을 계기로 재일 한인사회의 불신풍조를 없애고 서로 아픔을 감싸주는데 주력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조사장은 16년전 유학생으로 건너 왔다. 재일 한인사회의 가장 주목받는 중견 사업가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중국화교들이 세대차와 뿌리를 의식하지 않고 뭉치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재일교포와 뉴커머들이 겉도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말한다.연합회는 중점사업의 하나로 2세들을 위한 교육시설 확충에도 역점을 둘 계획이다. 도쿄의 한국 초중고교가 단 한곳밖에 없다 보니 신한국인들의 상당수 자녀가 일본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교육기관 추가 설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연합회를 중심으로 신한국인들이 굳게 뭉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오쿠보 일대의 거리 질서를 바로 세우는 등 작은 일부터 힘을 합쳐 해나간다면 일본 사회의 시선부터 달라질 것입니다.”조사장은 “21세기에는 뉴커머들이 한일교류의 첨병과 재일 한인 사회의 경제적 중심으로 우뚝 설 것”이라며 “연합회의 역할을 기대해 달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