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불거져 나오는 회계부정이며 대통령 이름까지 거론되는 내부자 거래의 연속극이다. 한마디로 뉴욕증권시장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신뢰위기라고 말을 하지만 실은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의 위기다. 김대중 정부가 사외이사제도를 의무화하는 등 부산을 떨었던 개혁 프로그램의 중심 메뉴였던 바로 그 문제.기업경영을 맡은 경영자(대리인)와 주주(주인) 사이의 정보 비대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 합리적인 이해 조정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코퍼릿 가버넌스 문제의 출발점이다. 경영을 수임한 대리인이 주인보다 회사내용을 더 잘 알고 있는 상황(정보 비대칭)에서 경영자의 사익 추구를 어떻게 막을 것이냐는 질문이 지배구조 논의의 핵심. 기껏 경영을 맡겨 놓았더니 출장 때마다 초호화 호텔에서 자고 식사는 언제나 최고급 식당이며 온갖 비리의혹이 있는 납품관계며….대리인을 주인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라면 스톡옵션 같은 감미제라면 충분하다. ‘주주를 위해 주가를 올려라. 그러면 너도 부자가 될 것이다’라는 주주들의 제안은 스톡옵션을 통해 CEO들에게 전달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문제는 기업의 자본금 규모가 대형화하면서 점차 주인 없는 기업, 임자 없는 자본주의가 되고 있는 점이다. 자본이 대형화하면서 대주주 지분율이 낮아지는 대신 증권투자자들의 비중이 급증했고, 그 결과 대리인에 불과했던 경영자들이 증권투자자를 등에 업고 기업을 지배하는, 소위 경영자 독재체제가 구축되고 있는 점이다. 미국 CEO들의 평균재임기간이 9.5년에 달하니 ‘한 번 경영자는 영원한 경영자’라고까지 부를 만한 상황.올 봄 월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HP사의 경영분쟁은 경영자가 오히려 대주주를 축출해 버리는 쿠데타로 연결되기까지 했다. 물론 대주주를 압도한 소액주주와 이들을 대리한 기관투자가들의 투표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증권투자자들은 칼리 피오리나와 함께 ‘증권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기업 소유주에 대한 비난은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을 찌를 정도다. 시민단체가 앞장서고 정부는 깃발을 들고 뒤따르고 있다. 당초 경영자를 견제하기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제도가 우리나라에서는 대주주를 견제하기 위해 도입되는 상황이다.증권시장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것도 증권화(Securitization)현상의 하나다. 대주주가 위축되는 현상은 자본의 대형화가 초래하는 필수적인 결과다. 글로벌시대의 기업생존은 거대 자본의 조달 가능성에 달려 있기 마련이고, 이는 잘 조직된 증권시장을 필요로 한다. 결국 증권시장과 증권투자자들이 이니셔티브를 넘겨받게 되고…. 그러나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최근 잇따라 터지고 있는 미국 경영자들의 방종과 부패는 ‘대주주 약화-경영자 독재’ 구조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소액주주와 기관투자가들은 단기적인 주가흐름에만 관심이 있을 뿐 기업의 장기적 발전문제는 안중에 없다. 또 언제든 주식을 팔고 떠나면 그만인 상황에서 대리인을 감시하고 경영을 책임질 동인도 약하다. 의사 표현방법도 ‘안건 반대’라는 수동적인 방법밖에 없다.걱정되는 것은 모두가 주인이라는 말은 때로 주인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공동의 책임은 언제나 무책임에 가깝다는 것도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부패경영자가 아니라 기업소유구조의 정체성 바로 그 자체다. 주인 없는 상태에서 경영자 자본주의는 과연 지속 가능한 것이며 증권투자자들이 ‘공동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지금 미국 증권시장은 바로 이 질문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