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외환시장의 크고 작은 변동이 언제나 시장원리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통화질서는 때로는 국가간 투쟁과 갈등,협상의 결과이며 언제나 총체적인 힘의 기울기를 반영한다. 일본의 좌절이 시작됐던 85년에도 그랬고, 엔화의 꿈이 짓밟혔던 97년에도 마찬가지였다.아시아가 외환위기의 와류로 빨려 들어가던 97년은 특히나 그랬다. 지구촌 곳곳에서 위기 사이렌이 맹렬히 울어대던 당시 일본은 엔화의 국제화를 적극 추진했고, 미국은 이를 극력 저지하고 있었다. 결과는 엔화의 참패로 끝났다.통화의 국제화란 일정한 지역 내의 서로 다른 다수 국가들이 특정 선도국가의 화폐를 결제통화 또는 준비고(準備高) 통화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선도국(주축국)을 자임했던 일본으로 보자면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아시아 인접국들이 엔을 국제통화로 받아들여주기를 간절히 원했던 상황. 물론 이를 위해 일본은 1,000억달러 규모의 아시아통화기금(AMF)창설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엔 국제화를 방해하는 미국에 대해선 일본이 보유채권(TB) 수천억달러를 국제시장에 내다팔면서 미국 금융시장을 초토화시킬 것이라는 흥미진진한 전쟁 시나리오들도 나돌았다.당시 한국 정부는 어리석게도 AMF를 지지한다는 거창한 성명까지 발표했고….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그대로다. 어찌된 일인지 일본 금융기관들의 신용등급이 무더기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한국까지 외한위기에 빨려 들어가면서 엔 국제화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기세 좋던 일본은 “급한 대로 100억달러라도 꿔달라”는 한국정부의 간절한 요청마저 끝내 거절한 채 꼬리를 내렸고…. 국제통화가 되는 데에는 경제력뿐만 아니라 주먹의 힘도 약간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과연 몰랐을까.시계를 약간 앞으로 돌려 85년의 뉴욕 플라자호텔로 들어가 보자.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경제적 성공과 미국 무역의 괴멸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환율협상이 후끈 달아올랐다.결국 미국대표가 연필로 125라고 휘갈겨 쓴 종이쪽지를 일본대표단 코앞에 들이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으로 지루한 협상은 끝이 났다. 당시 달러당 250엔 선이던 환율을 125엔으로,다시 말해 엔 시세를 두 배나 끌어올리라는 미국의 거의 폭력에 가까운 요구였다(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때 제시된 125엔이 엔시세 변동폭의 중심선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신경제의 원동력,달러강세의 전환점이었던 95년으로 돌아와도 사정은 분명해진다. 루빈 미 재무장관의 강한 달러정책은 잇단 금리인상과 함께 달러당 79엔의 초(超)엔강세를 불과 3개월여 만에 뒤집어놓았다. 개도국들과 그들의 후견인이었던 독일과 일본을 희생시키면서….얼마 전 청와대의 모 고위인사는 한창 급락세였던 원화 강세 대책을 묻는 기자들에게 “환율은 시장에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바로 그즈음 미국의 폴 오닐 재무장관도 “환율은 시장에서”라고 말하고 있던 것을 의식해서일까.그런데 폴 오닐은 이 말로서 달러 약세를 용인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지만 우리의 당국자는 똑같은 말로서 무엇을 시사하고자 했던 것일까. 재경부가 원화 강세를 막기 위해 부산을 떨었음을 생각하면 이 당국자가 원화 강세를 용인하겠다는 뜻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고….사실이 그랬다면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앵무새 처럼 “시장에서”를 되뇌고 있는 데 불과했을 터이다. 문제는 우리 당국자들 중에는 이 같은 앵무새들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