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환 총리 인준안마저 부결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렇게도 인물이 없냐”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인구 5,000만명의 나라에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대통령이 명분을 내세워 고집을 부리고 측근이 묘수를 생각하는 동안에는 인물이 기근일 수밖에 없다. ‘여성총리’에 이어 ‘세대교체 총리’라는 명분과 모양새를 만들어내려는 얄팍한 생각이 만들어낸 자충의 결과였을 뿐이다.묘수로서 문제를 풀려는 동안에는 언제나 사태가 꼬여가기 마련이다. “여성, 세대교체 등 개혁의 명분을 선취했으므로 내가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왕의 오만일 뿐이다. 국민들은 외형으로는 승복할지 모르지만 결코 마음속으로 심복하지는 않게 된다. 그러니 야당과 반대자들은 대통령의 그 잘난 명분을 꺾을 수 있는 무언가의 약점을 파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승복’과 ‘심복’은 이렇게 해서 하늘과 땅만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같은 허물도 덮어두는 경우가 있고 뒤집는 경우가 있다. 그것의 차이는 승복이냐, 심복이냐로 결정될 뿐 명분으로 내걸린 언어의 수사학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장상씨와 장대환씨가 모두 그런 면에서는 잘못 불려나온 탓에 괜스럽게 구설에 말려든 꼴이 됐다.정치 분야의 인사관리에서만 도식적 명분이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 분야에서의 사람관리조차 자주 비슷한 사고방식에 휘둘려 왔다. IMF 이후 금융계의 핵심요직을 모조리 외국은행 출신들로 채웠던 일들도 모두 어설피 배운 개혁도식을 무분별하게 적용한 결과다.대통령의 한 측근은 사태가 잘 풀리지 않자 “경제 분야에서도 인적인 청산을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할 정도였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면 모조리 갈아치우면 될 것 아니냐는 오만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인재고갈이라는 쓴맛을 보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유형의 측근들은 지금도 도처의 높은 자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네 편은 틀리고 내 편은 옳다는 지극히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총리가 아니라 그 어떤 자리에도 이제는 사람이 없어 보이게 된다. 내 편은 줄어들고 네 편만 늘어나다 보니 사람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이들의 가슴에는 “정권 말기가 되다 보니…”라는 오도된 핑계의 말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성리학의 조선이 나중에 그토록 인재기근에 허덕였던 것도 성리학 외에 모든 것을 배척했던 지적인 편협성의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DJ정부는 불과 4년여 만에 그런 상황을 맞고 있다.신지식인 열풍을 만들어내고 지식경영 슬로건을 앞장서 제창하면서 DJ정권과 주파수를 맞추었던 장대환씨를 정권의 마지막 총리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야말로 시종일관한 비극이요, 동시에 소극(笑劇)이다. 바로 그 슬로건으로 시작했던 정권이었으니 슬로건의 ‘기획가’를 마지막 총리로 삼는 것은 실로 그럴듯한 결말이기도 하고….춤 잘 춘다고 신지식인이 되었던 그때의 고등학생이나 갑작스레 신지식인의 표상처럼 솟아올랐던 그때의 코미디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싸구려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지적 수준의 문제다.‘누구누구 따라하기’ 식은 이제는 북한 같은 곳에서조차 통하지 않는 일이다.시대의 모델을 만들어내고 큰 상을 주고받는 따위를 에리히 프롬은 어른들의 장난이라고도 했다. 바로 그런 사고패턴이 명색 국무총리후보 선정에조차 적용되고 있다니 대통령을 잘못 유도한 측근들의 생각의 수준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하기야 대통령에게 별 의미도 없는 평화상을 안기기 위해 그렇게 열심이었던 측근들이기도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