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장인으로 추앙받던 영화감독 빅터 타란스키(알 파치노)의 현재는 초라하고 심지어 굴욕적이기까지 하다. ‘스타지상주의’로 물든 할리우드에서 이제 그는 딸 또래의 여배우인 위노나 라이더의 주전부리까지 손수 챙겨야 하는 형편이다.급기야 분노를 터뜨리는 바람에 여배우로부터 딱지 맞은 것은 고사하고 영화제작팀으로부터 레드카드까지 받게 된 타란스키. 낙심한 그가 쓸쓸히 촬영장을 떠나려는 차에 그 앞으로 뛰어드는 괴한 아니 더글러스.자신을 천재적 컴퓨터 엔지니어라고 소개한 더글러스는 타란스키의 딜레마를 영원히, 그리고 손쉽게 해결해 줄 묘수가 있다고 설득한다. 타란스키가 미심쩍어하는 사이에 더글러스는 죽어 버리고 그의 유품인 CD롬을 받게 된다.그것은 바로 더글러스 필생의 작품인 사이버 여배우 시몬(SimoneㆍSimulation One의 약자)의 프로그래밍 시스템. 컴맹 타란스키는 간단한 가상 조작만으로 미증유의 여배우 시몬을 만들어내고 그녀는 일약 세계의, 세기의 연인으로 급부상한다. 더불어 ‘퇴물’로만 치부되던 빅터 역시 금세기 최고의 감독이자 예술가로서 재조명된다.문제는 이 엄청난 기획의 실체를 아는 이가 타란스키뿐이라는 것. 스크린 밖에서 시몬을 향유하고 싶어 하는 대중 앞에서 끝도 없이 거짓극을 벌여야 하는 빅터는 위험수위를 넘어서버린 1인극의 딜레마는 둘째 치고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간이 갈수록 분열증적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실제 디지털 아바타를 출연시킨다는 소문 때문에 영화가 완성되기 훨씬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 <시몬 designtimesp=23376>은 내용상 시몬이 실사 이상의 리얼리티를 가져야 한다는 기술적 난제에 부딪혀 결국 차선책으로 캐나다 출신의 신성 모델 에반 레이철 우드를 기용했다.(우드의 미모는 알 파치노와 캐서린 키너의 검증된 연기력 이외의 공감각적 쾌락을 맛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신화적이다.) 영화 ‘안’과 달리 가상이라 선전해 놓고 실제를 기용하는 ‘밖’의 아이러니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화의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시몬 designtimesp=23379>은 표방하고 있는 주제의식의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오버액션이나 현학적인 오만 없이 편하게 봐 넘길 만한 영화다. 할리우드 영화의 강점이자 한계인 셈.디지털시대의 ‘프랑켄슈타인 박사’ 알 파치노는 단선적이지만 인상적으로 철학적인 딜레마에 반응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인 아바타를 제어할 수 없게 된 것에서 연유하는 권력적 질투와 초조함에서 시작, 당연하지만 보다 존재론적인 고민으로 나아간다.그것은 가상이 실제를 지배하는 초산업주의 문화에 보복하듯 적응한 ‘아날로그 예술가’가 느낄 법한 허무다. 불가사리처럼 커져 버린 ‘시몬’만큼이나 통제할 수 없어진 미디어와 대중의 천박한 속성에 대한 문화생산자의 무기력을 보여주는 그는 ‘가짜’ 시몬보다도 존중받지 못한다. 객체가 주체의 존재 근거를 넘보는 아이러니. 이 얼마나 익숙한 비극인가!할리우드답게 사유보다 에피소드 중심이고 롱테이크보다 팝업 이미지 중심으로 그려지는 <시몬 designtimesp=23386>의 결론은? 무언가 비장하고 패배주의적인 것을 기대했다면 할리우드의 생리나 시뮬라크르가 가능성 실현의 장으로 검증된 지 오래인 사이버스페이스에 아직 심통이 나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혹여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기대치를 ‘다운’ 그레이드 하시길.‘기만’이 미디어의 속성임을 역설하는 <시몬 designtimesp=23389>은 익숙하면서도 아이러니하다. 우리네 문화적 소비의 즐거움은 진위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의 효과적 재생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