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의 노인이 논두렁길에서 만나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이들이 공통의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경우가 많다. 서로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을 대화라고 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노인들에게는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은 일이 많을 뿐이다.개그콘서트라는 TV프로그램에 나왔던 ‘700-오병팔이’ 코너도 비슷한 상황을 다룬다. 무대에 오른 몇인가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스토리가 연결되는 듯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실은 각기 무대 밖의 다른 사람과 휴대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주제로 대화하고 있지만 ‘동일한 단어’들로 말꼬리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 ‘700-오병팔이’의 포인트다.무대와 논두렁길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선술집의 밤이 깊어갈수록, 취객들의 혀가 꼬부라질수록, 그래서 서로가 자신의 내면으로 빠져들게 되면서 불행히도 모든 취객들은 타인에 대해 점점 ‘700-오병팔이’가 되어 가는 것이다.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점차 낮아져 2010년께에는 드디어 4.5% 수준으로까지 추락할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잠재성장률은 사전적으로는 ‘인적ㆍ물적자원을 정상적으로 투입해 얻을 수 있는 경제성장률의 최대치’를 말하지만 통계를 처리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적잖은 편차를 보이는 그런 지표다. ‘정상적으로…’라고 하는 것은 ‘인플레를 유발하지 않는…’을 의미하지만 정확하게 수치화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어떻든 KDI는 80년대 9%에 달했던 잠재성장률이 90년대 전반기에 6.8%대로, 후반기에는 5.7%로 이미 떨어졌다고 분석하고 이대로 가면 2003년부터는 4.8%, 2008년 이후에는 4.5%로 낮아질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물론 “우리가 경제개혁을 게을리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조건부 전망이다. KDI의 이 보고서를 대부분의 신문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개혁 안하면 잠재성장률 떨어진다’ 등의 제목으로 보도했다. 문제는 이 ‘개혁’이라는 단어였다.‘개혁 안하면’이라는 KDI의 조건문은 마치 노무현 정부가 상표로 내걸고 있는 ‘개혁’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것과는 정반대다. ‘노무현 개혁’을 주창하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개혁’은 안되며 역으로 ‘시장경제 개혁, 구조조정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무역과 투자를 자유화하며 생산적 행위에 대한 유인을 강화하고, 재산권을 보호하며 경쟁체제를 구축하는 등이 KDI가 지목한 개혁항목들이다. 한마디로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 등 요소생산성을 높여야 잠재성장률이 올라가는 것이지, 투입만 늘린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었다.‘요소생산성’ 등의 어려운 경제용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정면도전하고, 그 성공가능성을 전면 부인하는 그런 내용들로 가득 찬 비수를 품은 듯한 공격이었다.여성인력 등의 ‘투입을 늘리는 방법’으로 7%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고, 자유무역협정(FTA) 등 대외개방에 대한 보호장치에 중점을 두며, 생산적 행위보다 분배적 정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새정부의 정책기조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책연구원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의 완곡한, 그러나 도도한 반론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런 보고서였다.“뭐, 투입을 늘리는 방법으로 7% 성장률을 달성한다고? 웃기는군. 제대로 가도 5% 남짓인데 당신들은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는 말이야”라는 것이 바로 KDI 보고서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었던 것이다.‘개혁’이라는 같은 말을 쓰고 있지만 실은 상대방의 칼(단어)을 빼앗아 상대를 공격하는 이중플레이였기도 하고…. KDI의 어법이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