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스트라고 하는 해외펀드의 SK(주) 주식매집이 화제다. 경영권을 탈취하기 위한 것인지 아직은 미지수다. 그러나 SK글로벌 처리와 SK텔레콤에까지 적잖은 영향을 줄 것은 확실하다.크레스트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다면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SK그룹은 거의 해체에 버금가는 타격을 입게 된다. 사업을 재구축하고 투자자원을 다시 배분하며 효율성이 낮은 자산을 매각하라는 것이 해외펀드의 요구다.크레스트의 SK 주식매집을 기업경영성 제고라는 관점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해외투자펀드의 무분별한 경영개입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 논란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사회단체들간에도 적잖은 논란이 있다.일부에서는 재벌들의 경영투명성 제고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하고도 있다. 참여연대 같은 단체들은 ‘적극 환영’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다지 반대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대안연대’ 같은 단체들은 자본에도 국적이 있다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가.사실 크레스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기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맞닿아 있다. 크레스트의 요구가 모두 수용된다면 SK는, 그리고 SK그룹은 궁극적으로 어떤 모양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 봄직하다.불행히도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경영의 투명성은 불가피하게도 어느 정도까지는 투자 의사결정의 비효율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투명한 경영, 공개된 토론으로 기업의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기업이 단기적인 주가상승을 경영의 주된 목표로 할 것인가, 장기적인 성장발전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경영투명성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SK가 계열사 주식을 팔아치우고 SK텔레콤 주식을 매각해 버리면 투명성은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또 당장의 캐시플로(cash flow)도 크게 개선될 것이 틀림없다.그러나 그룹이라는 틀을 버렸을 때 SK의 기업구조가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를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단기적 시각에서 기업을 볼 수밖에 없는 주식투자자로서는 당장의 기업가치 제고를 목표로 하겠지만 기업의 장기적인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대주주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사실 경영 사이클에 대해 양자는 서로 다른 시계를 쳐다보고 있는 꼴이다.누가 누구를 공격하고, 경영권을 지키느냐 탈취하느냐 따위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기업경영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는 원천적인 질문이 크레스트 주식매집 사태에 깔려 있다.크레스트는 자신들의 투자기간이 평균 4년 정도 된다(길다는 의미에서)고 밝혔지만 대주주에게 이 4년이란 너무도 짧은 기간이다. 대주주와 소액주주는 ‘주주’라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기업에 대한 접근방식과 태도에서는 차라리 모순적이며 적대적인 관계일 수도 있다. 내일 보유주식을 팔아치워도 그만인 자와 영구히 주식을 안고 가야 하는 자에게 주식은 과연 동일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단기적인 성과를 추구하는 투자자와 장기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대주주는 분명히 동반자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질 뿐이다. 크레스트가 SK로 하여금 보유자산을 모두 팔아치우고 당장 내년에 50%의 배당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응해야 할 것인가.우리의 질문을 투자에 대한 대가, 즉 배당으로 돌려보면 사태는 분명해진다. 유보냐 배당이냐 문제는 언제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증권시장이 존재하는 동안 이 갈등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누구의 편을 들고 안 들고의 문제는 아니다. 또 자본의 국적 문제만도 아니다. 기업은 무엇이며 기업경영의 장기적 가치는 무엇인지가 이번 사안의 초점이다.